2012-04-17 / 시스룩 / 이기원

 

어떤 공부가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17일 새벽, 카이스트 4학년 학생이 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카이스트의 자살은 지난해 4월부터 시작해서 벌써 6번째이다.(교수 1명 포함) 작년에 학생들이 자살하자, 문제가 되었던 영어강의와 징벌적 수업료를 개편한 바 있다. 수업료의 부담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또 죽음을 택했다. 그의 유서에는 열정이 사라지고 진로가 고민된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20대 초,중반의 학생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이공계 대학인 카이스트 학생들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마 난다 긴다 하며 천재 대우를 받고 앞길이 창창했을 텐데 그들이 죽음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점으로 결정되는 수업료

먼저 카이스트에서 문제가 되었던 징벌적 수업료를 알아보자. 서남표 총장이 오기 전까지 카이스트는 학생들을 절대평가하고 국가지원도 받아 대부분의 학생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서남표 총장이 오면서 평가 방식이 상대평가로 바뀌었다. 경쟁이 없어 학생들의 학업수준이 떨어진다며 상대평가하여 C, D학점을 준 것이다. 또한 수업료를 면제 받을 수 있는 학점 기준을 두어 0.01 미달될 때마다 6만원의 수업료를 내는 제도를 만들었다. 유급된 학생은 아예 장학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되면 1인당 내야 하는 수업료가 1학기당 최대 800만원에 이른다. 이 우스꽝스러운 제도는 계속 문제가 되었다. 변별력을 갖기 위해 상대평가로 바꾸었으면서도 평가를 낮게 받으면 수업료를 내라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본인이 열심히 한 것과는 상관없이 상대평가를 만들면 누군가는 반드시 학점이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학점과 수업료의 압박이 얼마나 컸는지 2011년에만 카이스트 학생이 4명이나 자살했다. 그 후 서남표 총장은 영어강의와 수업료 정책을 변경했다. 그러나 2012 4월 또 한명의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했다. 이것은 카이스트의 문제가 비단 징벌적 수업료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1등 제일주의에 빠진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초중고 시절에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것이 익숙할 것이다. 시험을 본 후에는 일등부터 꼴등까지의 순위를 복도에 붙여 놓는가 하면 성적에 따라 우열반을 나눠 수업을 하기도 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 공부 못하는 아이를 나누는 순간 학생들이건 부모들이건 할 것 없이 모두 공부 잘하는 축에 끼고 싶어한다. 부모들의 경우는 친척,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자녀들 이야기를 한다. 어느 집 아이가 몇 등을 했다, 무슨 대학을 갔다 등 공부를 잘하는 자녀는 자랑거리가 되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는 부끄러워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 점수가 1점이라도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선생님들 또한 교육청으로부터 시험점수를 낮게 받는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줄이라는 압박을 받는다고 한다. 왜 공부를 하는가의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는 모두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라야 봤자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이것이 전부이다. 학생들은 그들의 성적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낀다. 사실 대학에 간다고 성적 경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천재, 수재 소리를 들으며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절이 있었고, 또 그들은 공부라면 그만큼 자신 있었을 것이다. 카이스트는 그렇게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 놓은 곳이다. 그곳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 잘 못하는 학생이 갈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고등학교 때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아마 이 학생들의 상실감 내지는 패배감은 더 컸을 것이다.

 

저당 잡힌 현재

이번에 자살한 학생은 열정이 사라지고 진로가 고민된다.라는 말을 남긴 채, 기숙사 옥상에서 떨어졌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열정이 사라졌다니. 아직 좌충우돌해도 괜찮은 나이인데 진로가 고민된다니.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린 나이에 죽긴 왜 죽느냐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으면 죽음을 택했겠는가. 그렇다면 이 삶에 대한 공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왜 삶은 공포가 된 것일까. 공부만 열심히 했는데 4학년이 되고 보니 공부만으로 내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은 아니었을까. 부모도 선생님도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면 무언가 될 거라는 희망을 주었다. 분명 기대와 희망은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희망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현실로 나타난다. 공부를 잘해야 잘 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공부를 잘해도 더 잘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는 것도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많아져서 편하다고 느낄 뿐이다. 오히려 그 편리성으로 인해 실제로 내가 문제에 부딪혀 해결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경쟁에서 이탈해 다른 공부를 한다는 것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신체가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면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말은 오지 않는 미래만을 기다리게 하는 공허함을 주기에 딱 알맞다.

 

다른 공부 실천하기

지금까지 이 사회에서 강조한 공부는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위치가 어딘가를 확인하는 공부였다. 이러한 공부로는 내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가기 힘들다. 스스로 질문하는 능력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공부를 잘하면 나중에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생긴 것일 뿐이다. 무엇을 열심히 할 것인가의 문제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다. 도박을 열심히 해서 타짜가 될 수도 있고, 공부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좋아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이 정도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선택했으면 그 후에는 반드시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고,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살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계속해서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서 공부를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하는 키 재기 방식의 공부는 아니다. 다양한 인물을 삶을 돌아보고 그들을 살게 한 가치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살게 하는 공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