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수정본입니다~

 

2013.04.07 / 청년대중지성 영어강독-정치 /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최영은

 

Interview – Zygmunt Bauman on the UK Riots

인터뷰 – 지그문트 바우만, 영국 폭동을 말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뉴스테이츠먼*의 유명한 마무리 질문인데, 공감이 가는군요. 소비주의가 만연한 포스트 모던 사회는 운이 모두 다한 걸까요? 본래의 시나리오 대로라면 시장은 어떻게 기능해야 합니까?

*New Statesman: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국의 정치, 학예 주간지

  몇 달 전 프란코이스 플라허는 공익과 공익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연구를 발표했고 이 새로운 연구는 철저하게 “개인화”된 최근 사회형태에 맞춰졌습니다. 그 주요한 메시지는 인권의 개념이 최근 “올바른 정치”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잠식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인권의 개념은 공익의 개념 위에서만 가능하죠. 우리에게 인간의 공존과 사회생활은 “좋은 삶의 양식”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산물 덕분에 얻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때 공동생활의 경험, 제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른 문화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을 증진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인간적 유대를 개인적 경쟁과 적대의식으로 변형시키려고 하는 부의 지수에 집중하는 것 대신에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직 확실하고 현실에 기반 한 답이 없다는 것은 다음을 시사합니다. 부에 대한 추구와 시장에서 공급한 소모품들을 향유하는 것, 그리고 남들보다 한 발 더 앞서고 싶은 마음 모두가 무한한 경제 성장으로 통합되어 거의 누구에게나 행복한 삶의 비법의 역할을 하는 이 현실을, 과연 공생의 즐거움이 대체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자연적”이든 “고유적”이든 “자발적”이든 공생의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공리주의의 덫에 빠지거나 시장의 조정을 거치지 않고 요즘 같은 지배적인 사회의 분위기에서 추구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거절의 결과로 이 공생을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리 대학의 팀 잭슨 교수는 그의 최근 책인 「번영의 재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날의 성장모델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장”이 여가, 건강, 교육과 같은 가치보다 오직 물질적인 생산량에 의해서만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팀 잭슨은 경고합니다. “이 세기가 끝날 쯤에 우리의 후손들은 이상기후, 고갈된 자원, 거주지의 파괴, 대규모의 멸종, 식량 고갈, 집단 이주 그리고 거의 불가피하게 전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로 등 떠밀고 권력자에 의해 열광적으로 조장되는 소비는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경제적으로 불안정합니다." 잭슨은 또 다른 섬뜩한 통찰을 합니다. – 우리 사회에서는 전 세계 상위 5%의 부자들이 세계 연 수입의 74%를 얻는 반면 하위 5%의 가난한 자들은 2%만을 가집니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좌절시키려고 하는 귀족이 경제 성장 정책을 이용하여 그들의 피폐함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당화는 순전히 이성에 대한 위선이며 모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중요 매체들은 대부분 이러한 잭슨의 관찰을 무시합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황야에서 울부짖는 가난한 자들의 곤궁에 대해서 무뎌지고 체념한 목소리를 취급하는 신문 한 장이나 짧은 방송쯤으로 격하해버립니다.

 가디언지* 2010년 1월 23일 호를 보면 제레미 레젯은 잭슨에게 힌트를 얻어 제안합니다. 운이 다하거나 자멸을 초래하는 번영과는 다르게, 지속적인 번영은 “부를 포획하는 관습적인 수단” 밖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추가하자면 물질과 에너지의 이용, 오용 그리고 남용 밖에서도 말입니다.) 지속적인 번영은 관계, 가족, 이웃, 공동체, 삶의 의미 그리고 나아가 “미래에 가치를 두는 현실적인 사회가 지닌 소명”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있습니다. 잭슨은 최근 경제성장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 “미치광이, 이상주의자, 그리고 혁명가”의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냉철하게 말합니다. 그 자신이 이 중 하나 또는 셋 모두로 취급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성장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식의 이념을 가진 주창자와 맹신자에 의해 정해진 것일 뿐입니다.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장에서 우리는 매일 먹는 빵을 제빵사의 이타심이나 자선, 선행 또는 높은 도덕적 기준에가 아닌 그의 욕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상품이 시장의 가판대에 있어야 하고 우리가 꼭 그곳에서 구매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익을 추구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욕망 때문입니다.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을 위한 복지와 자유라고 말하는 아말타도 다음과 같이 인정합니다. (아말타 쎈의 2011년 겨울호 인디고지에 기고한 에세이 “글로벌 세계의 정의” 참고) 사실 시장의 범용 없이 경제가 번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장의 필요성이 증가하는 것을 막기보다 오히려 올바른 경제계의 한 부분으로 시장을 길러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첫째, 이익 밖의 것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시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품도 함께 말입니다. 둘째, 우리가 오직 서로의 위험을 공유하고 그로인해 추동되었을 때, “경제의 번영”과 이기심 그리고 탐욕을 위한 시장은 제거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결론은 이타심과 번영하는 경제를 함께 생각하는 이는 바보들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한 쪽을 가질 수 있지만 둘 모두를 가지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잭슨은 이러한 심각한 장애물을 인간의 이성과 신념의 힘을 믿음으로써 뛰어넘습니다. 이성과 신념은 둘 다 강력한 무기이고, 의심할 바 없이 “경제 체계의 재구축”에 있어 굉장히 효과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성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순간, 무기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영악한 전문가들이 이러한 현실을 합리화 할 때, 현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그 어떤 논쟁보다 “신념의 힘”은 강하게 제거됩니다. 그들이 설명하는 현실이란 새로움을 점점 더 강하게 갈구하는 방식으로만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제, 즉 사회의 보존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적 충돌과 적대감을 해결 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물론,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는 경제 성장에 대한 욕구와 열망을 계속 불러일으킵니다.

  잭슨의 계획에는 세 가지 핵심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경제 성장에는 한계가 있음을 사람들에게 숙지시킬 것. 자본가들이 이익을 분배 할 때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이롭도록 할 것. 그리고 정부를 통해 물질주의적 방식 밖에서도 삶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최근의 경향을 제대로 배치하고, 그럼으로써 사회 논리를 변화시킬 것.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가장 먼저 보상을 구하도록 만들어온 인간조건들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진짜인지 추정인지 알 수 없고 해결책도 없는 불만과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료법이나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기만적인 희망이나 허영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제공하는 것 외에는 출구를 찾을 수 없고 계속해서 소비자 시장으로 초점을 돌리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인간조건의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고도 앞서 말한 계획을 심사숙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