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4//청년대중지성3분기/역사/<레미제라블>에세이/김민경

 

위고의 역사

 

소설읽기에 대한 고백

솔직히 말하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 (소설에 무지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이때까지 읽었던 소설들은 한국, 일본, 영미 너나할 것 없이 주인공 개인의 심연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그런 책들이 권장되었고, 이것을 제외하곤 무엇을 읽어야 할 줄 몰랐었다. 자신에게만 한정된 시야, 끊임없는 상처, 자기 연민 등. 읽고 난 후에는 내 정기를 빼앗기는 것만 같아 나는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도 소설 코너에는 발길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이번 분기에 읽는다는 것이 장편소설이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맑스보다 레미제라블을 더 걱정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소설은 나에게 퍽 매력적이었다. 내게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본질적으로 세계를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시의 파리가, 역사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이번 에세이는 내가 생각하는 위고의 역사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다른 층위의 역사 : 6월 혁명&하수도

<레미제라블>을 읽을 때 매우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줄거리와 연관없어 보이는 특정 사건이나 장소를 위고가 매우 길게 서술할 때였다. 특히 나에게는 6월 혁명과 하수도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게 느껴졌었다.

우리 조의 조별 과제는 6월 혁명에 관한 조사였다. 6월 혁명은 태어나서 처음 들은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찾아보며 2가지에 놀랐다. 도서관에서 프랑스 역사에 관한 열 몇 권의 책을 몽땅 찾아보아도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인터넷으로 6월 혁명을 검색했는데 모든 블로거의 글이 여기에 대해선 위고가 잘 써놓았다. <레미제라블>을 봐라고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함께 겪은 역사가는 누구도 남기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위고만이 열렬히 묘사한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는 5권의 장발장이 바리케이트에서 부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업고 질노르망씨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하수도를 통과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보다, 하수도라는 공간 자체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한다. 그런데 이건 하수도를 묘사하기 위해 장발장을 끌어들였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껏 어느 책에서도 하수도의 이야기를 본 적은 없었다. 위고는 하수도를 빠리의 내장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시궁창의 역사였다. 파리의 버려진 모든 것은 하수도를 향한다. 시체, 분뇨, 사람까지도. 6월 혁명과 하수도, 위고는 왜 남이 쓰지 않은 것을 쓴 것일까.

위고는 이 소설에서 카메라맨과 같다. 그의 앵글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인물도 장발장에서 질노르망씨까지, 장소 역시 귀족에 대한 로망을 여전히 간직한 왕당파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응접실에서부터 파리의 오물이 모이는 하수도까지.

위고는 거대사에서 쓰이지 못했던 역사를 썼다. 거대사가 한 가지 층위의 역사를 묘사했다면, 위고의 역사는 중층적이다. 그 중층적인 역사가 어떻게 기존의 역사와 다를 수 있는가. 사실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언뜻 보기엔 기존의 역사도 중층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사를 쓰거나 관람할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드라마나 소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인물 군상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주연과 조연이 나뉘며 그들의 비중을 맞추어가며 나열되는 이야기. 이것은 위고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존의 거대사가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의 합으로 역사라는 전체를 구성한다면, 위고는 모두가 전체이지만 다른 층위에서 바라보는 문제이다. 그는 언제나 전체를 찍고 있다. 다만 그가 ZOOM을 조절하고 있으며, 초점을 이동시킬 뿐이다. ZOOM과 초점이야말로 층위이다. 그는 전체 ZOOM을 줄였다 확대했다 한다. 그래서 거시적이었다 미시적이었다, 도시의 바닥이었다가 화려한 네온사인이었다가 하는 것이다.

부분의 합계가 전체라는 일반적인 의견은 모든 사건과 인물에 경중의 기준을 부과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대사의 역사가들은 지면이 부족해서 쓸 수 없는 사건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그러나 위고는 말한다. 위고는 언제나 전체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도 그 시대를 더 잘 표현해준다고 판명할 기준이 없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서술하지 못할 사건이 없다.

 

혼재에 관하여 : 위고 혁명의 특이성

전쟁은 하나의 진동이다. 수학적 도면은 움직이지 않는 정지화면에 대한 설명이지만, 전쟁은 실제 상황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는 정확함을 요구하는 수학적 도식과 법칙으로서는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한 순간에 관해서는 맞는 설명이나, 바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자 마자 오류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전쟁은 수학적 법칙이 아니라 폭풍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전장에 국지적인 변화의 순간이나 따로 따로 나뉘어진 개별 사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 전체를 서술하는 역사가는 역사를 그 부분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종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레미제라블>을 통틀어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장발장의 프랑스식 이름이 레미제라블인 줄 알았다. <레미제라블>이 장발장이라는 인물이 개과천선하여 위인이 되는 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탓이다. 그런데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장발장의 비중이 이토록 적다니!였다. 이 책에서 주연과 조연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레미제라블>에 그런 구별이 존재나 하는 것일까.

다시 위의 인용문으로 돌아가보자. 위의 인용문은 <레미제라블>에서 워털루 전쟁을 묘사하며 위고가 쓴 말이다. 나는 위의 문장이 단순한 전투 이야기나 역사 서술방법의 차원을 넘은 위고의 역사론에 전체에 관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태풍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까닭은 태풍이 가져올 혼란때문이다. 파괴되고 쓰러지는. 그러나 사실 태풍에는 그런 요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풍은 혼란이라기보다는 혼재이다. 태풍에는 태풍이 일어날 때의 혼란함, 태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올 고요함에 대한 기대, 비와 바람 등의 물질적 요소들, 이런 혼잡합 속에서도 태풍의 핵은 너무나 고요하다는 아이러니 등 이 모든 것이 단단히 얽혀서 만들어진다.

이 이야기 역시 앞에서 거대사 역사가들이 개별 사건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전체 역사를 만드려 했다는 비판과 연결된다. 기존 역사가들의 그 의식에는 사건과 인물들이 시대와 타인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그런 식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고의 혁명 묘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8306월 혁명은 군대가 바리케이트를 섬멸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 그렇기에 거대 역사에서 이것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폭동이라고 불린다.(거의 불리지도 않겠지만) 그러나 위고의 말에 따르면 이 혁명은 급속한 반발과 슬픈 종말로 막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요소들이 있다고 한다. 혁명은 상상력을 뒤흔든다. 혁명의 중요한 점은 그 순간에 정치권력을 장악해 지배 세력이 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후대에 새로운 계기를 촉발해 줄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구글의 어느 블로거는 그 후 10~20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폭동은 이 혁명이 변형이라고까지 말했다. 6월 혁명도 과거의 어느 혁명으로부턴가 계기를 받았음에 분명하다. 사건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불씨는 옮겨붙는다. 사건에는 모든 시점들이 교차해 있다. 그 어느 것도 제외되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사건 속의 인물들은 어떠한가. 위고는 6월 혁명 때 바리케이트에서 일어나는 시가지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내가 이 때까지 어떤 시위나 혁명을 묘사할 때는 굉장히 비장하고 용맹한 투사들이 하나의 목적성을 갖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6월 혁명은 너무나 깬다. 실연을 당해 죽는 게 낫겠다 생각한 마리우스 같은 자가 있질 않나, 너무나 혁명에 어울리는 앙졸라 같은 인물도 있고, 분위기에 따라 모인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틀은 바리케이트의 긴박감 뒤에서도 일상 생활과 같다. 그 와중에서도 누군가는 술을 먹고 잠이 들고, 농담을 주고받다가, 감동을 받고, 싸우고, 먹는다. 사건도 인물도 어떤 하나의 목적성을 띄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개의 감정과 욕망이 뒤얽혀 과열될 때 사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앞서 사건에 경중을 매길 수 없는 까닭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인물도 주연만이 가치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인공은 혼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미리엘 주교가 없는 장발장도, 장발장이 없는 자베르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위고가 한 일은 인물 개체들의 묘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인물 군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넝쿨들을 그리는 일이다.

 

역사가의 자격

이 책을 읽으면서 위고는 굉장히 감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이 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떨 때는 애정이 듬뿍 담긴 문체로, 어떨 때는 자신이 격분해 어쩔 줄 모르면서 글을 쓴다. 사실 나에게는 객관적인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본질을 쓴다고 할 수 있을까. 6월 혁명에 대해 역사가들이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역사가들은 기록이 없는 것에 너무 주저했다고, 위고는 그 객관 사실보다 그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위고가 이 책의 제목을 <레 미제라블>이라고 지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이 책은 개인 주인공에 대한 책이 아니다. 미제라블이라는 복수들, 비참한 복수들에 관한 내용이다. 즉 비참했던 시대와 세계에 대한 위대한 묘사이다. 비참한 복수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기록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만화 <26>에 보면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아버지를 잃은 여자가 후에 교사가 되어 그 사건을 설명하는데, 자신이 겪은 생생한 상처들이 교과서에는 한 줄로 밖에 요약되지 않음에 절망하는 장면이 있다. 위고가 이런 사람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설은 거대 역사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을 쓸 기회를 준다.

위고를 보고 나는 알게 되었다. 역사와 문학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문학으로 역사를 쓸 수 있고, 역사로 문학을 쓸 수 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가 객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억이다. 기억되는 것은 서술된 만큼이다. 그토록 많은 것을 제외한 거대 역사가가 더 정학하다고도, 픽션을 섞은 위고가 더 정확하고도 판별할 수 없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조건은 하나이다. 자신의 층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역사가에게 필요한 건 층위이다. 층위의 차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이고 zoom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누구에게나 다르다. 역사가는 객관을 파악하는 자가 아니다. 다만 그 층위의 카메라로 성실히 세계라는 태풍을 촬영하는 자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