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어제 공포의 15분 강의를 저와 선민이가 돌아가면서 했습니다.... 결과는 말 안해도 아시겠죠?

그나마 채운샘이 처음이라고 생각해줘서 큰 비난은 안하셨습니다. 대신 저와 선민에게 수행과제를 내주셨습니다. 매일 30분정도 

 이번에는 2장 세계의 산문을 쭉 읽으면서 내용 정리를 하였는데요

밑에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2장  르네상스 시기의 에피스테메

푸코는 이 시기를 닮음으로 세계를 포획하여 지식을 구성하는 시기로 보았다. 푸코는 이 닮음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콘베니엔티아(적합), 아이물라티오(경합), 유비, 그리고 감응와 반감이다. 그런데 사실 이 4가지로 딱 분류해서 볼 수 없는 부분이 당연히 존재한다. 여러개가 겹치기도 하고, 굳이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구축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기의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푸코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방법론으로 시대를 파헤치고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채운 샘은 말하셨다.

어쨌든 이 4가지의 유사성의 종류로 인해서 한 사물은 다른 사물과 연결되면서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사성은 드러나 있지 않다. 이를 가시화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표징이다. 바꽃은 눈에 좋은 약초이다. 그런데 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은 하얀 바탕에 검은 점으로 된 바꽃 씨앗의 표징을 통해서이다. 즉 비가시화를 가시화로 뒤 바꾸는 역할이 표징을 통해서, 혹은 기호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세계의 모습은 문장(紋章), 특징, 지표 모호한 말, 이를테면 터너가 말한 상형문자로 뒤덮여 있다”(59) 세계는 이 기호를 발견하고 해석하기면 하면 되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지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책에서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것과 동일하다. 세계는 비밀스럽지만 이 표징만 찾으면 동시에 알 수 있는 지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 가장 많이 안다는 사람은 이것은 무엇이랑 닮았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박학자이고, 마법사이다. 사람의 손금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손금이 표징이고 점술사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 손금은 재미삼아 보는 심심풀이일 수도 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선 이것도 과학과 똑같은 지식의 위치에 속해있었다.

그런데 닮음으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a=a'이고 또 a'=a'' 이고 또.... 이렇게 무한히 확장될 수밖에 없다. 채운 샘은 무한을 사유할 수 있을 때는 라이프니츠 이후라고 말하신다. 즉 끝없이 확장되는 지식을 어느 틀에서 가둘 필요가 있다고 르네상스인들은 인식했을 거라 푸코는 생각했고, 그 시대의 소우주라는 개념은 지식에 확장에 대한 한계지점을 긋는 것이라는 것을 포착한다. 대우주는 소우주를 통해서 무한하지만 종국에는 셀 수 있는 인간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인간의 신체를 작은 세계로 생각하는 방식. 혈관은 강이요, 방광은 바다와 같다 등등)

언어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이 나타난다. 이 당시 세계는 거대한 책과 같다는 인식에서 지식이란 이 책에 계속해서 주석을 다는 것이었다. 주석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결국 원전으로 회귀해야만 하는 점에서 소우주 개념과 동일하다. 이 둘은 차이가 없다. “텍스트에 대해 이해방식은 사물에 대한 이해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68) 이런 지식으로 남긴 저작을 고전주의 시대 인물이 보기엔 괴상했으나 그저 에피스테메의 동일한 배치에 따라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77)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이 푸코의 방법론을 따라 살펴보면 역사나,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을 편견 없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괴상한 것은 지금 우리가 아닐까? 이 에피스테메가 푸코가 또한 담론과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개념이라는 것을 본다면 이 방법론이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역사적 회의주의라고 붙여도 되지 않을까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다시 돌아와서 르네상스 시대 언어와 사물을 똑같은 차원에서 생각해서 이런 인식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 또한 세계속에 포함된 하나의 사물처럼 인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관찰된 것과 이야기된 사이의 비()구별’(76)이 된다.

채운 샘은 우리에게 본다읽는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본다라는 것은 가시적인 대상을 본다는 것이고, ‘읽는다라는 것은 그 대상에서 무엇인가를 얻는 행위기 때문에 비가시적인 운동이라고 하였다.(우리가 책을 읽을 때 글자의 색깔이나 스타일에 신경 안 쓰지 않는가) 우리에겐 이 구별이 확실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이 구별이 확실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상상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이게 바로 근본적인 인식의 실증적 기반의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5장 갑자기 뜬금없이 나온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채운 샘이 푸코가 문학에 경도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은 p.s같은 느낌이지만 멋있기에 읽으라고 강독을 시켰다. 언어가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푸코의 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푸코의 책을 읽으면서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멋있는 것도 이런 이유인가?...


자 다음 금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 공지입니다. 


금요일엔 돈키호테 1권을 다 읽고 페이퍼를 쓰고 오셔야 합니다. 분량은 많지만(600페이지!) 

 재미있어서 어렵잖게 다 읽으실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엔 <말과 사물> 3장 재현하기까지 읽고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그 전에 2장 미니 강의는 

 수영누나와 해완이입니다. 점점 어려워지는데 걱정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