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령어와 간접화법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는 명령어이다. 명령어는 믿으라고 있는게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언어는 정보전달이 최소이고 나머지는 잉여이다.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는 언어는 수많은 소음과 함께 전달이 된다. 전달된 언어는 청자에 의해 해석이 되어진다. 청자에게 소음과 같이 전달된 언어는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하고 나머지는 잉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청자는 화자의 언어를 변수로 전달받게 된다. 
 언어는 주변의 환경과 사건에 의해 절단되어 지기도 하고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단되고 표현되는 언어는 청자에 의해 해석이 되어지는 데 그 언표는 실체는 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기는 오해를 낳는다. 청자에 의한 해석인 오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복종은 실천이고 행위이다. 언어(형식)는 언제나 행위(기계)와 관련되어 있다. 언표는 그 자체로 행위와 언표의 잉여이다. 명령어는 모든 단어와 언표가 암묵적 전제와 맺고 있는 관계이다. 명령어는 단어 자체를 언표 행위로 만드는 변수이다. 명령어의 순간성과 직접성은 변형이 귀속되는 몸체들을 변주할 역량을 단어에 제공한다.
 언어 전제가 간접화법이다. 간접화법이 직접화법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직접화법이야 말로 간접화법으로부터 축출된 것이다. 언어는 보여진 것과 말하진 것 사이에 성립하지 않고 말하기와 말하기 사이에 성립한다. 간접화법은 언어 행위의 집합적 배치이고 모든 언어는 집합적이다. 나는 내가 말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내가 기억하는 집합의 언어이다. 나는 내말을 하지만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우글거리는지 보아야 한다. 언어는 환경과 변주에 따라서 매번 다른 언어로 말해진다. 아버지, 남편, 아들, 직장상사 또는 부하, 고객 등 하루에도 수많은 사회적 위치에서 다른 언어들이 사용되어 진다. 그리고 그 순간에 신체는 변형은 겪는다. 실체로는 비물체적 변형을 겪고 것이고 그 순간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루소가 말한 <0의 순간>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배우들의 표정이 절제되고 주변의 소음이 제거된 상태에서 대사가 읽혀진다. 마치 국어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대사가 읽힌다. 그런데도 오해가 생긴다. 아무리 표정과 소음을 제거해도 명령어는 잉여와 같이 전달된다. 이미 말하기에는 여러명의 목소리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영화 속 주인공들은 오해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도 항상 말의 오해 속에서 살아고 있다. 그러면서 항상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아니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나섰다가 오해만 더 키운다. 삶에서 오해하도록 그냥 놓아두는게 답일 수 있다.

2. 비물체적 변형

비물체적 변형은 <0의 순간>에 일어난다. 언표와 더불어 잉여를 만드는 행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행위들은 특정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이 사회의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 같다. 배치물은 행위자들이자 언표들인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며,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이다. 마르크스가 슬로건은 하나의 비물체적 변형이었다. 이 슬로건이 프롤레타리아의 몸체로서 주어지기 전에 이미 대중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도출해 냈던 것이다. 
명령어가 바뀌자마자 정치는 어휘뿐 아니라 구조며 모든 문장 요소들을 변주시킨다. 진정한 직관은 문법성을 판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전체와 관련해서 언표행위의 내재 변수들을 평가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명시적 지령으로부터 암묵적 전제로서의 명령어로 나아갔다. 그리고 명령어로부터 명령어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 또는 비물체적 변화로 나아갔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 나아갔다. 명령어는 이 배치물들의 변수에 해당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전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핵심부대인 9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9군단의 요구는 급여의 인상과 제대이다. 9군단은 폼페이우스와 중요한 결전을 앞둔 시점에서 카이사르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이 반란은 해프닝으로 끝난다. 카이사르는 9군단의 반란에 맞서 그들을 향해 "시민들이여!"라고 외친다. 그 순간, 9군단의 반란은 진압이 된다. 카이사르의 이 한마디에 9군단은 반란자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전락시킨다. 평상시 카이사르는 군단에서 연설할 때 항상 "동지들이여!"라고 불렀기 때문에 "시민들이여!"는 9군단의 제대를 인정한다는 명령어이다. 카이사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카이샤르는 언표를 바뀌어 불렀을 뿐인데 9군단은 그 순간에 비물체적 변형을 겪는다. 9군단은 "시민들이여!"라고 명령어를 듣는 순간에 군인에서 시민이 된다. 카이사르의 명령어는 그들은 시민으로 되돌려 놓은다.  9군단에게는 치욕이었고 반란은 이미 잊혀지고 그들은 눈물로 카이사르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들은 제대 요구는 본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3. 다수어와 소수어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해야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 자기 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 수 있다. 랑그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모국어란 없다. 규칙이라면 말은 움직일 때마다 규칙이 바뀌는 높이에서처럼 변주 그 자체와 더불어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임시규칙뿐이다. 
확실히 방언 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다수어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라기 보다는 권력의 표지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언어이다. 한국의 표준어는 수도권의 중산층이 사용하는 언어를 기준으로 만들어 진다. 이와 같이 다수어는 특정한 계층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기준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다수어를 가지고 문법을 조금씩 비틀거나 제거하는 빈곤과 문법을 비틀고 변형된 것들이 반복되는 과잉에 의하여 소수어가 만들어 진다. 따라서 소수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에서 소수어가 만들어 진다.
소수어는 방언이나 사투리와 달리 다수어가 구부러져 생성되어 진다. 방언이나 사투리에서도 문법으로 기준이 되는 다수어가 존재한다. 또한 게토의 언어와 같이 닫혀있는 언어는 소수어가 아니다. 소수어는 다수어가 비틀어지고 구부려 사용되고 있을 때 소수어가 되고 창조가 이루어 진다.
연암의 전통의 한자문법을 사용하면서 문법을 조금씩 비틀어 놓거나 다른 한자음을 채용한다. 그래서 연암을 글을 읽을 때 이 소수어를 만나게 되면 읽는 이에 따라 또는 읽을 순간마다 글의 해석이 달라진다. 글이 변주가 되는 것이다. 글이 읽는 사람과 읽는 그 순간에
따라 음악처럼 음색과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 글은 매번 다른 음색과 화음을 들려준다. 아니 읽도록 해 준다. 그래서 대가의 작품은 오랜기간 읽히고 고전이 된다. 고전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변수가 있다.
프루스트가 위대한 작가의 작품은 외국어로 쓰여진다고 한 말은, 모든 사람이 아는 언어인 다수어 속에서 약간씩 변형이 되어 언어가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법이 될수도 있고 미술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 등 각각의 언어의 영역을 다른 영역에 달라붙게 한다. 소수어-되기는 있으나 다수어-되기는 없다.

질문
다수어는 존재하는가? 한국의 수도권 중산층의 언어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개인마다 자신의 환경에 따라 언어는 변주되어 사용된다. 그렇게 변주되는 언어는 변수만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다수어는 문법적 텍스트로만 있을 뿐 실재하는가? 

PS. 화면으로 두번 읽고 올렸는 데 프린트하여 읽고 오탈자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