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행위는 다른 무엇의 해방을 위하여 어떤 종류의 활동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수도승이 경건하게 묵상하면서 사원의 홀을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거닐 때, 그래서 그의 보행이 회전예배기를 하나하나 돌릴 때 그는 주저 앉아 글을 쓰는 행동의 생생한 예증을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마음은 관찰과 지식에 편파되지 않으므로 오로지 자기의 날개짓으로 선회하는 형체들의 세계를 명상에 잠겨 방황한다. 어떤 폭군도 불법으로 취득한 그의 굴복한 왕국의 괴뢰들에게 의지를 쏟지 않는다. 오히려 탐험가는 자기의 꿈의 잠든 실체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꿈꾸는 행위는 버려진 집에서 맑은 공기를 한 번 들이쉼과도 같이 마음의 집물을 새로운 환경에 위치시킨다. 의자와 테이블이 협동하고 악취가 발산되고 게임이 시작된다. ... 보는 것, 아는 것, 발견하는 것, 즐기는 것-이러한 기능이나 능력은 자각 없이는 창백하고 생명이 없다. 예술가의 게임은 현실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안에 비친 패배한 전쟁터의 모습이 보여주는 단순한 ‘재앙’이상의 것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고 이래 세계가 인간의 육안 앞에 드러낸 모습은 아마도 패배한 대의의 징그러운 전쟁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랬었고, 인간이 스스로를 단지 갈등의 보금자리로만 보기에 그칠 때까지 사뭇 그러할 것이다. 인간이 ‘제3자의 나의 내’가 되는 과업을 떠맡을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헨리 밀러, <섹서스>)
[빠지다] 세미나 시즌 3이 지난 주에 끝났습니다. 헨리 밀러,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까지. 미국을 넘어 세계문학의 거장이라 추앙받는 이들의 글들을 매주 거의 한 권씩 읽어나갔습니다. 한편으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무턱대고 "좋은 소설"이라고 떠받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편으론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태도, 삶에 대한 비전, 나름의 깨달음 등. 특히 헨리 밀러의 글을 읽다 글쓰기는 아직 형체를 갖지 않은 생명 없는 꿈들의 형체를 빚어내고 거기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새로운 환경"에 위치시키는 세계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발췌해놓은 부분들을 다시 읽어봐도 그의 글은 참으로 멋집니다!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했던 헨리 밀러의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목적이 저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인듯한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아직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게 뭘까, 계속 물으면서 가는 수밖에요. ^^
다음 번 시즌 4는 영미문학 마지막 편입니다. 오스카 와일드, 조셉 콘래드, 레이몬드 카버, 토니 모리슨 등. 공지는 곧 올릴 예정이니 기다려주세요. Coming Soon!
p.s. 후기가 늦어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도 잊지 마시고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덧글로 올려주세요! ^^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오클라호마 시골의 붉은생 땅과 회색 땅에 마지막 비가 부드럽게 내렸다. 이미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빗줄기가 개울을 이루어 흘러갔던 흔적위로 쟁기들이 오락가락했다. 마지막 비에 옥수수가 쑥쑥 자라고, 길가의 잡초와 풀 들이 점점 퍼져 나가 회색과 검붉은 색을 띠고 있던 땅이 초록색에 가려 사라져 버렸다. …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옥수수 위에서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칼처럼 뾰족뾰족한 초록색 이파리 가장자리를 따라 갈색 선이 점점 번져 나갔다. … 하늘이 점점 연한 색으로 변하자 땅도 덩달아 연한 색으로 변했다. 붉은생 땅은 분홍색으로, 회색 땅은 하얀색으로.
(9~10,1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어니스트 헤밍웨이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와 있던 당신 동지의 몸에서도 난 죽음의 냄새를 맡았거든.
…그 냄새는 말이야, 배에서 폭풍우를 만나 선창을 꼭꼭 닫아 놨을 때 맡게 되는 냄새와 비슷하니까. 흔들리는 배 안에서 꽉 닫힌 선창의 구리 손잡이에 코를 갖다 대봐. 그러면 정신이 멍해지고 배 속이 텅빈 것 같아지면서 어디선가 그 냄새 비슷한게 풍겨오거든. …아직 이슬이 촉촉한 포장 도로 위에 서서,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도살한 소의 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노파들을 기다리는 거야. 밀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 움푹 꺼진 뺨과 턱에는 마치 콩에서 싹이 나온 듯 노령의 수염이 가득 나 있지. 까칠까칠한 털이 아니라 죽음의 얼굴에 나는 희끄무레한 솜털 말이야. 잉글레스 양반, 그 노파를 두 팔로 꼭 안고 끌어당겨 그 입에 키스해 봐. 그때 나는 냄새가 바로 그 나머지 냄새야." (19~22, 2권)
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매주 접하는 작가와 문장과 단어들이 새로웠고 많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빠지다'였습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마음에 많이 남네요. 아직 글을 읽는 것이 서투른 저에게 몇 줄의 문장으로 선명한 물감과 펜으로 그림 그리는 듯한 장면을 눈 앞에 떠오르게 하고, 문장에서도 향기(또는 냄새ㅎㅎ)가 난다는 걸 알려준 이번 시즌 작가들이 멋졌어요! 당분간 꾸준히 글을 쓸 사람으로, 살아있는 글의 힘을 느끼고 이런 문장을 한 줄이라고 써보고 싶다고 내내~ 느낀 세미나 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좁은 시각으로 제 맘대로 책을 읽어가서ㅋㅋㅋ 제가 보지 못한 많은 부분을 다른 분의 얘기로 포착하고 생각이 깨지는 것도 즐거웠어요! 한 시즌 동안 모두 수고하셨고 다음번에 또 새로운 책으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