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탁선생님이 "문탁웹진"에 쓴 글입니다. 읽어보고 참고하세요.

 

우리의 일상을 한미 FTA 반대 현장으로

문 탁

중년아저씨들이 촉발한 한미FTA 반대시위

2006년 봄,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한미FTA반대를 위해 길을 나섰다. 그해 봄, 상징적인 세 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대법원이 최종 추인함으로써 새만금 간척지에 대한 개발이 재개되기 시작했고, 또 하나는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평택 대추리의 농민을 강제로 추방시킨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한미FTA를 체결하겠다는 정부의 선언이었다. 당시 정권은 노무현의 소위 ‘참여정부’였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도 노무현 정권은 재집권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솔직히 그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노무현 정권보다 더 나빠지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명박의 한나라당이 전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물론,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4대강 개발사업으로 전 국토가 뒤집혀졌고,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직장에서 쫒겨 났고, 아름다운 제주마을 강정은 해군기지 건설로 인해 인심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청년백수는 늘고 전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자살률은 세계최고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웬만한 일들은 놀랍지도 않게 되었다. 11월22일 한미FTA비준동의안이 날치기로 처리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 이런 일이 또 일어났군, 정도였다. 비일상적 사건이 일상화 되면 모든 감각은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아마 동네에서 혈기 방장한 중년 아저씨들이 골목시위를 조직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중심에 문탁회원인 ‘무담’이 끼어 있지 않았다면 한미FTA에 관한 일은 또다시 내 일상에 끼어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미FTA, 우리의 질문은 무엇이어야 할까?

문탁네트워크는 ‘닥치면 무엇이든’ 하는 곳이다. 우리는 반FTA로 모드 조정을 하였다. 급하게 특강을 조직하고, 긴급세미나를 발의하고, 골목시위에 참여하고, 골목시위를 취재하였다. 그런데 시위를 하려면 피켓을 만들어야 하고, 피켓을 만들려면 구호가 있어야 하는데. “한미FTA반대”만으론 부족하다. 한미FTA? 그게 도대체 뭔데? 그게 내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데? 그 물음이 없다면 절실함도 없고, 절실함이 없다면 투쟁과 저항은 곧 휘발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골목시위 사이에 이해영교수를 모셔다가 "한미 FTA, 실패한 미래?“라는 제목의 특강을 조직했다. 이해영 교수의 강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 한미FTA, 과연 경제적 효과는 있는가? 두 번째, 한미FTA와 관련된 가장 핫(HOT)한 아이템인 ‘ISD(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어떻게 볼 것인가? 세 번째, 한미FTA비준동의 이후 투쟁 로드맵이다.

첫 번째 의문 -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우선 첫 번째, 한미FTA체결로 인한 경제효과. 복잡한 통계자료를 활용한 이해영교수의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미FTA로 인한 경제성장, 즉 GDP성장의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 것이라는 정부 측의 주장은 한마디로 ‘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미FTA체결이후 10년간 6%p 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은 “생산성증대효과고려모형”을 사용한 것인데 이는 글로벌 스탠다드인 “표준모형”과는 다른, 순 국내용에 불과한 것이라서 6%p 성장이라는 건 순전히 ‘데이터마사지”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 어렵다. 전문가들이 전문적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제시하는 각종 통계들은 읽어내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니 우리 같은 필부필부들은 한쪽에서 말하는 “뻥치지 마라”와 다른 한쪽에서 말하는 “괴담을 유포하지 마라”사이에서 우왕좌왕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그런데 한미FTA경제효과가 글로벌 스탠다드 모형인 0.32%p 성장(표준모형)이든, 아니면 국내테크노크라트들의 모형인 6.0%p 성장이든, 아니면 이해영 교수의 모형인 0.08%p 성장에 불과하든, 이 차이가 정말 중요한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방법론이 잘못되었다고 전문가적 식견을 드러내고 티격태격 하는 사이에 “한미FTA, 경제효과는 있는가?”라는 질문의 전제는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더 좋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는 전제의 확고부동함! 그런데 폴라니를 공부한 우리라면 그 전제를 질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도대체 경제가 뭐죠?” “경제, 즉 시장경제가 확대되면 정말 우리 삶이 나아지나요?” “혹시 경제성장이라는 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완벽히 상품으로 또 시장으로 포획하자는 건 아닌지요?” 라고!

두 번째 의문 - 국익? 누구의 국익인데?

두 번째, 소위 ISD 문제! 이해영 교수는 ISD문제는 공익 대 외국의 사익의 문제라고 전제한 후 공익을 담당하는 국가가 국내에서 벌어진 각종 무역 분쟁에 국내법을 적용시키지 못하고 국제재판에 무조건 끌려 나가야 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이 국제재판소(ICSID : International Center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는 결코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이 국내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간접수용‘이라는 조항과 더불어 보수판사 조차 열 받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의문이 생긴다. 과연 공익=국가라는 등식이 맞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역대 정권의 모든 국책 사업은 ‘공익’ 혹은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IMF이후 우리의 ‘국익’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불합리한 경제관행, “기업하기에 나쁜” 각종 규제들은 우리의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떨어뜨린다, 투명하고 합리적이고 국제사회에서도 통하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더 넓은 물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경쟁력을 키워라! 이게 바로 ‘국익’ 논리였다. 그리고 그 ‘국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개발을 위해 자연이,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주장되었다. 이 ‘불가피함’의 논리 속에 경쟁력 없는 기업과 인간들은 가혹하게 퇴출되었다.

ISD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논리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글로벌 스탠다드는 국익의 논리 위에서 추구된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국익과 글로벌 스탠다드는 다른 이름이 아니다. (이게 ISD가 미국과의 FTA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다른 나라들과 맺은 많은 FTA에도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FTA를 찬성하는 쪽에서도 줄기차게 주장하는 논리가 ‘국익’ 아닌가? 그러니 ‘국익’의 논리로 ‘국익’을 비판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어떤 게 더 ‘국익’인가라는 논의도 무의미하다. 오히려 우리는 “국익”? “지~~랄”! 이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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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의문 - 정권교체가 정말 대안이 될까?

세 번째, 한미FTA비준동의 이후 투쟁 로드맵. 이해영 교수는 한미FTA반대진영에서도 즉각폐기를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재협상을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후, 반대진영 각 주체의 역량에 맞는 싸움을 조직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년 총선, 대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상관료들의 전면 교체라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협정문읽기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협정문을 그것도 영어로 읽어보자고 권유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 시점에 맥이 확~ 풀려버렸다. 난 우리가 협정문을 영어로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총선? 대선? “글쎄올시다”이다. 난 초국가적인 국제투기금융자본의 깡패 짓을 막는 데 국민국가가 전략적으로 유효한가, 아닌가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설령 국민국가가 국제깡패를 막는데 전략적으로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내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우리가 그런 정권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IMF체제를 적극 받아들이고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목청 높여 주장하던 바를 생생히 기억하는 나는 내년에 “선한 정권”을 탄생시켜 FTA를 막아보자는 주장이야말로 정말 순진한 주장이거나 아니면 (“이번엔 민주당을 찍으면 잘 될 테니 민주당에 표를 주세요”라는) 또 하나의 꼼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을 FTA 반대 현장으로

지난 24일, 세 번째 골목시위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날도 추웠지만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서민경제 다 죽이는 FTA폐기하라!”는 구호도 외치고 다양한 ‘가카송’도 불렀다. 이제 예정된 동네 골목시위는 끝났다. 아직 동네 지도부^^에서는 새로운 지침을 내려주고 있지 않다. (ㅋ!)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골목시위를 더 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골목시위가 아닌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골목시위가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건 이 동네에서 다종다양한 자율적 공동체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시장과 화폐, 경쟁과 계약 관계의 외부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함께 돌보는 관계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한미FTA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올 한해 '333 프로젝트'에 참여해 4대강 답사도 갔다 왔고, ‘희망버스’에 올라 부산 한진중공업에도 갔다 왔지만 희망 보다는 절망을 느낄 때가 더 많았다. ‘잼다큐강정’도 친구들과 함께 보고 분노했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고작 강정마을에서 고등어나 귤을 사 먹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루쉰의 말대로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희망이 여의도에 있다고 생각할 때, 희망이 바리케이트 저편에 있다고 생각할 때, 희망이 희망버스 안에만 있다고 생각할 때,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런 희망, 허망한 희망을 품을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 한명 한명이 희망이 되어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신자유주의, 그들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 전부를 우리 신체 구석구석을 자본주의적으로 포획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월스트리트의 1%의 탐욕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식민화한다. 이제 전장은 바리케이트 앞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전장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법 역시 일상!이다. 일상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일. 합리적 투자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경쟁력을 높여 자신을 더 좋은 상품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일!

어떻게 일상을 급진화 할 것인가? 일상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생산할 것인가? 묵묵히 꾸준히 이 과제를 수행할 것! 그럴 때만이 혁명은 느닷없이 벼락처럼 찾아올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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