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 아공법공. 空 이라는 개념은 불교를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봉착하게 되는 난관이다. 고전학교에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 개념과 금강경을 읽으면서 친해져보고자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아트만이라는 자아를 있다고 보았고, 초기 불교는 변해가는 자아의 이면에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며 아트만의 자아는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我만이 아니라 諸法이 공하다고 본 것이 금강경의 요지이다.

 

모든 것은 공간의 점유가 아닌 정보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막힌다.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실체없음을 보지못할 때 생기는 것, 정보의 흐름으로 존재하는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말 같다고 일단 때려맞추려고 하는데, 스스로에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계속 이어가자면, 모든 것의 실체없음을 알고,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다. 존재는 정보의 흐름, 조건에 따라서 매 순간 다르게 존재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변화하는 정보의 흐름을 언어로 고정화시켜서 기억해가는 것을 '업'이라고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는 생각, 내 눈앞에 있는 책이 어제의 그것과 같고 앞으로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러한 기억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번 강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보리심'에 대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지혜인 보리심을 항상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라는 것이 금강경의 주제인데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보통 쉽게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생각은 질문을 던질 때 시작된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문제의식을 갖는 다는 것. 내가 고전학교에 와서 처음 접한 공부 방법이 책을 읽으면서 막히는 부분, 의문이 가는 부분에서부터 붙잡고 씨름하는 방식이었다. 그전까지는 공부하다가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나타나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 전하고 읽고 난 후에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생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불교수행이라고 한다. 어떤 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바뀐 생각, 새롭게 난 생각의 길을 계속 고집해서도 안된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 어떠한 근원적 사유체계에 머물지 않는것.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도 다른 '나'를 만들어 나가는,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