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8.1 / 정화스님 금강경 강의 네 번째 시간 후기 / 미료

 

하나의 질문이 맺히는 순간

 

  벌써 네 번째 강의다. 강의가 거듭될수록, 후기를 쓰기가 힘들어졌다. 스님 말씀 중에서 들리는 말은 들리고, 안 들리는 말은 안 들리는 대로, 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것, 의문으로 끌고 갈 것이 남지 않았다. “‘기억’이 상相일뿐 아니라 마음작용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 몇 번 들었던 말이다. 그러니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말이다, 라고 생각되는 거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 말, 따라가지 못하는 이야기에 대해선 손을 놓아버린다. 이렇게 되면, 백날 들어도 소 귀에 경 읽기다. 스님 말씀은 고스란히 그냥 그런 말로, 고정된 실체로 남아있다. 오히려 내 마음이 얽매이게 될 종자가 된다. 그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 맥락 없이 그대로 인용하기는 참 쉽지 않은가. 컵 모양을 ‘컵’이라 부른다, 고 익히듯이, 스님의 말씀을 그렇게 익히고 있다... 그것이 나라는 의식意이 정보法들을 파악하는 패턴이다. 이렇게... 후기는 써지지 않는다. -ㅜ 익숙한 정보에 대해서는 이미 안다고 생각하니 쓰지 않으려 하고(이미 아는 것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거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여간해서는 알기 힘든 것을 생각해보자, 는 의지를 내지 않는 거다.) 고전학교 에세이를 쓸 때도, 번번이 여기에 걸려 넘어져왔다.

  그런데 이건 비단 글을 쓸 때의 내 개인의 문제, 인간이 생각, 행동할 때의 문제뿐만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경험하는 삶, 우주(8아뢰야식) 자체가 기억의 패턴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몸은 많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원자의 종류는 우주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존재했던 수소, 헬륨 뿐 아니라 우주 단위 사건, 또 지구 단위의 사건 속에서 생성된 것들도 있다. “우리 몸의 기억은 곧 우주의 기억”이고, “생명의 역사는 기억(그러니 우리가 범박하게 생각하는 ‘생각’으로서의 기억뿐만이 아니다), 패턴의 역사다.(강의 중)

  불교학파 중 하나인 설일체유부의 통찰에 의하면, 경험을 통해 얻어진 기억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사건이 된다고 했다. 업은 삶의 활동이면서 동시에 그 활동의 여력(기억)이다. 우리의 생각, , 감정, 움직임 모든 것은 일어난 뒤에 그 힘을 남긴다. 그것이 남아 있다가 미래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되풀이된다는 것이다.(이번 시간 강의 중) 우리는 기억으로 사건을 해석(분별)한다. (새로 마주한 상황을 좋았던, 나빴던 등등의 기억을 가지고 ‘좋은’사건이다, ‘나쁜’사건이다, 라고 해석해버린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내는 기관( - , , , , , )을 가진 존재다.(유근신有根身) ‘나’는 주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여자라든가, 미료가 아니라, 이전(이런 몸과 마음으로 뭉치기 훨씬 전부터의)의 활동이 남긴 것, 여력의 모임이다.

   네 번 강의를 들으면서 스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분별, 생각뿐이다.이번 시간에도 나왔다. ‘죽음’이 붙어서. “죽음 앞에는 기억, 생각의 길들만이 남아있다. 죽음을 어떻게 볼까, 그 생각만 남아있다는 것이다.이는 ‘그 정치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처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 그러니까 추상적인 ‘죽음’ 개념에 대한 생각이 남아있다는 말이 아니다. 존재가 스스로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다.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그 동안의 기억으로 해석하듯이, 개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진정, 닥치는 사건으로서 죽음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대부분의 사건을 이렇게 별 생각 없이 경험한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십대의 석가모니는, 자신이 결국에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을 때까지 물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없는가? 그의 질문은 여기서 맺혔다. 존재의 (진정...)궁극적 상황에서 기존의 생각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스스로 판단할 힘을 낸 것이다. 그는 맺힌 질문을 놓지 않고 끌고 나갔다. 정화스님 표현대로라면 하나의 사유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논리적 추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그는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고.

  매번 글을 쓸 때마다(다른 많은 순간들보다 특히) 어렵지만, 그 때마다 글을 통해서 묻고 넘어서자는 마음이 든다. 질문을 맺고, 풀어가고 싶다는. 지금까지 올린 후기와 지키지 못한 마감시간이 반증해주듯이, 낑낑대는 중이다. 정화스님은 이번 강의 마지막 즈음에, “다른 생각, 새롭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이 금강경이 던지는 메세지라고. 그러니 용기 내어 마지막 후기까지, 정진..!

 

p.s. 제리샘.. 죄송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