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전혀 모르는 인물을 강의를 들어가며 탐사해가는 일도 흥미롭지만 평전이라도 한 권 읽은 적이 있어서 약간 낯을 익힌 인물인 경우는 그 나름대로 또 기대와 호기심이 생긴다. 더구나 선생님과 일치하는 견해나 감정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쏠쏠하다. (어머!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맑스와 엥겔스의 우정이 관중과 포숙아와 연결되는 지점이 그러했다.

하물며 누군가를 만났을 때 서로의 소신이 완벽할 정도로 일치할 때의 그 환희란 어떤 것일까?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기쁨을 누렸다는 점에서 확실히 행운아들이다!

 

프랑스 혁명(1789)이 있은지 30여년 뒤에 태어난 두 사람.

신과 왕이 그리고 영주가 굳게 담합한 세상,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왕과 왕비를 단두대로 보내는 일이 일어났다! 우째 이런 일이!

헤겔은 진단한다. 이게 바로 이성의 힘이라고. 정신은 위대한 이성의 힘을 지녔고 그 힘으로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국가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라고.

현실은 고정되지 않고 항상 변하는데 그 변화의 추동력은 대립과갈등 즉 모순이다. 역사의 그 어떠한 것도 긍정적인 동시에 모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현실을 끌어안아 지양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렇게 태어난 현실은 또 부정되면서 다시 지양하기를 반복하는게 역사라고 헤겔은 말한다. 이른바 변증법이다.

이는 오랜 역사동안 변하지 않았던 기득권 세력인 신권정치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프로이센 제국에겐 위협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비롯한 진보주의자들에겐 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맑스도 대학에서 헤겔에 심취한다. 엥겔스, 바쿠닌. 키에르케고르...당대의 인재들 거의가 헤겔의 사상으로 꿈을 키운다.

그러나 헤겔은 중년이 되어 지금의 프로이센 국가가 거룩한 정신으로 지양해온 완전하고 최종적인을 표현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앞으로 더 이상 변화할 필요 없이 역사가 최종지점에 왔다는 것으로서 현 프로이센의 전제정치와 현 브로즈와 산업사회를 긍정하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고 변증법의 전복성을 중시하던 청년 헤겔은 어디로 가고 이제 헤겔은 중년이 되어 이 모양인가? 극소수의 브로주아를 제외한 대다수의 프로레타리아의 처참한 삶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절망하여 방황하는 청년 맑스. 아직 청년 헤겔주의자로 남아 있긴 했지만 사실 헤겔의 이론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과연 인간의 이성이 역사를 추동할까? 이성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위대한 정신의 힘일까?

 

여기에 힘을 실어주는 철학자 한명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헤겔의 제자 포이어바흐였다. ‘생각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 생각이 나온다라는 그의 명제는 이성을 우선시 하는 헤겔의 명제를 뒤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맑스가 보기에 그의 이론은 현실의 사회, 경제적인 것은 고려하지 않는 머릿속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현실참여를 해 달라며 당부하는 맑스의 원고청탁을 그는 거절한다.

 

맑스는 외로웠을 것이다.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야유와 독설을 퍼붓고, 친구의 별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아 동업하던 연보를 폐간하는가 하면 한번 비틀리고 나면 철천지 원수가 되고 신문지상에 까지 그 약점을 공개하고야 말고 계급투쟁에 헌신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그의 행동은 출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혁명가의 히스태리처럼 느껴진다.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고 바꾸려 하지 않는 진보주의자들. 같은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작용하여 세계변혁의 장애로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독일엔 맑스 이상으로 외로운 청년이 또 한명 있었다. 바로 엥겔스이다. 멘체스터에 방직공장을 둔 부유한 가문의 외아들로서 가업승계를 위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재벌 2. 24개 국어를 하는 천재적인 언어능력에다 베를린 대학 청강생으로 당대의 인재들과 나란히 지성의 대열을 이루고 글솜씨가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고 게다가 핸썸하고 잘 생긴 엄친아중의 엄친아’!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청년이 외롭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 출신 메리번즈와 동거하면서 멘체스터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주의 속살을 보아버린 것이다. 그의 정치, 경제학비판은 이 외로움의 고백이었다. 맑스는 이글을 읽고 단박에 필이 꽂혀 버린다. 그는 엥겔스를 천재라고 평했다. 자본가가 자본가를 비판하는 글. 프롤레타리아의 참상을 고발하는 글. 이론은 무장하였으나 자본의 실제 흐름에 무지했던 맑스는 이 글을 읽으며 부절이 딱 맞아 떨어질 때의 그 완벽한 일치의 환희를 예감하지 않았을까?

 

둘은 드디어 만난다. 1884년 파리에서 맑스 26, 엥겔스 24. 장장 열흘에 걸쳐 밤을 세우며 포두주를 마시며 토론했다고 한다. 이 때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그들이 어떤 행복감으로 열흘을 보냈을지 상상이 가능하다. 자신들의 사상을 이데롤로기적으로 설득하는 데는 자신보다 맑스가 한 수 위라는 것을 발견한 엥겔스의 기쁨. 멘체스터의 공장주로서 자본의 기제와 흐름을 훤히 알고 노동자들의 참상을 아파하며 혁명을 꿈꾸는 엥겔스를 만난 맑스의 기쁨. 둘이 공유한 혁명의 자신감! “모든 이론적 분야에서 의견이 같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그 때부터 공동작업이 시작되었다.”(엥겔스의 회고) 세계를 뒤흔든 우정이 시작되는 기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우리들에게 회향했다. 18482월 혁명때 나온 '공산당 선언', 1867년 '자본', 맑스가 죽은 뒤 미발표원고를 엥겔스가 정리하여 낸 '자본2' ‘인터내셔널활동.

 

'자본'은 맑스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그 사상을 맑시즘이라 부르지만 정확히는 맑스-엥겔주의라 해야 옳다. 2월 혁명이 실패했지만 맑스는 다시 대영제국 박물관으로 향했고 그렇게 하도록 채근하는 엥겔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맑스는 수시로 실물 경제에 대해 엥겔스에게 물어가면서 썼고 원고는 엥겔스에게 보내져 검토를 받았고 (당시의 빠른 우편 덕분에)편지로 토론했다. 출간된 뒤 반응이 없자, 엥겔스가 강의를 하면서 알리고 주석을 다는 일까지 했으니.

더구나 엥겔스의 물질적 원조까지 없었다면 그의 집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맑스는 돈을 벌지 못하면서도 사치라고 할 정도의 상류생활을 했다. 없을 땐 침대, 아이들 신발까지도 전당포에 잡히고 끼니를 굶다가도 돈만 생겼다 하면 분에 넘치게 살았다. 모든 유산을 앞당겨 쓰고 없으면 으레히 엥겔스에게 편지쓰고. 밑빠진 독에 돈 보내는 엥겔스. 아예 말년엔 연금을 마련해주는 엥겔스. 맑스가 죽은 뒤 딸 사위 가정부에게까지 물주가 되는 엥겔스.

 

자본 전문가인 두 사람이 자본을 쓰는 방식. 소비 일색인 이 사람들의 삶은 우리을 아연케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하면서 브루주아의 삶을 산 이들. 프로레타리아 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장의 노동자에게 특별히 온정적이지는 않는 자본가. 경영을 잘 하여 확실하게 이익을 챙기는 자본가. 하늘과 땅 만큼의 모순에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맑스가 사위에게 한 말을 그 해답으로 삼는 건 어떨까?

학문은 연구결과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학자가 공적인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치즈속의 구더기처럼 서재나 연구실에 틀어박힌 채 동시대인들의 삶과 정치투쟁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품위 유지를 위해서? 그렇다. 그들은 명예와 품위를 중시했다. 그것은 축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채권과 채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돈을 빌리면서도 갚으려 하지 않았고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빌려주면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벌지 않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많이 벌었지만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프롤레타리아로 살지 않기 위해 만나고 토론하고 글을 썼다.  그들은 믿는 바대로 반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그 동력은 이성이 아니라 우정이었다.

 

친구가 힘들 때 돌아서지 않고 도와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도와줄 수는 있어도 친구가 잘 될 때 질투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막상막하의 천재였던 맑스와 엥겔스, 그들은 인지상정의 한계를 넘어섰던 신적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