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이제야 ㅋㅋㅋ


갑자기 생각나서..

미흡했던 끝 부분 수정했어요.

불현듯 무슨 말인지 나름대로 이해가 가서 써봅니당


『죽음의 집의 기록』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끼

관찰 기록부

죽음의 집은 감옥을 가리키는 비유다. 그래, 감옥이란 죄를 지은 사람들, 음흉하고 께름칙한 사람들, 쉽게 어둠과 부정적인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 주거하는 곳이니까. 죽음이라는 단어도 이와 비슷하게 부정적이고 음침한 의미로 한 패처럼 사용해도 안 될게 없지. 하지만 그와 달리 도선생(도스토예프스끼)은 본인의 수감생활을 경험삼아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생생함을 보여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이곳은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 어느 곳과도 더 이상 비교될 수 없었다. 그곳에는 자기만의 특별한 법칙들과, 복장과 풍습과 관습 등이, 그리고 살아 있으나 죽은 집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과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20)

저자는 유형 기간을 ‘산 사람이 관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관에 어울리지 않게 죄수들이 얼마나 활발한 생명력을 가졌는지, 그 생생한 기운들이 어떻게 절망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지! (벅차게)많은 인물들 하나하나를 통해 죄수들에 대한, 감옥에 대한 오해들을 벗겨내면서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실, 나는 아주 초반부터 이미 도선생의 통찰력과 죄수가 된 이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감명 받고 있었다. 그것은 ‘인내’에 대한 얘기였는데,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옥이란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인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감금되고 통제에 따라 노동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원치 않는 것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형벌에 대한 단순한 인내를 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대신, 청년 시절에 감옥에 들어와서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어 나가게 된 것에 대해 (그런 자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지 말라며 일일이 옥사를 돌아 인사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감옥에 대한 원망도 세월도 초월하는, 인생사 그 자체를 인내하게 되는 종류의 것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범죄와는 어울리지 않는 죄수, 무뚝뚝하고 매서운 눈을 가진 흉악범다운 죄수, 그러나 그 중에도 대범하고 여유로 가득하여 훌륭하기까지 한 죄수, 천상 누군가에게 빌붙어보려는 죄수, 그 속에서도 술장사를 해서 거들먹거리고 권세를 누릴 줄 아는 죄수, 우울하고 고독한 죄수, 난폭하고 입에 욕설을 달고 사는 죄수들, 그럼에도 성탄절이 되면 온순하게 웃으며 어린아이들처럼 기뻐하는 죄수들. 이 한 권에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는지 차마 다 입에 올리기 어렵다. 감옥에서 만난 죄수들이란, 대중 또는 민중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을 가장 밀접하게, 천성적인 부분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야말로 이 감옥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귀족이란 신분에게 있어서 말이다.

어떤 주어진 정신과 수준 정도를 맞추기란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이 경우에는 교양 자체도 척도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교육받지 못하고 가장 압박받은 계층일지라도, 정신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발달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391)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 (455)

민중에 대해, 감옥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것들과 고민들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어렴풋이 이해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놀라웠던 것은 바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여겨지는 감옥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류(類)의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본성적으로 ‘사람이란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보다 개개인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귀족에게 부여되는 고상한 속성을 지닌 범죄자, 장군에 어울린다고 하면 오히려 모자란 듯 굳세고 위엄 넘치는 죄인, 반대로 노예처럼 천성적으로 빌붙는 것으로 살아남는 아랫것들 그리고 온갖 온상들, 즉 마치 세상의 사람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이 다양한,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들을 하나하나 그러모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도선생이 인간 본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의미화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제도에 대한 물음과 인간적인 인간에는 계몽 불가능한 본성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관찰들이 ‘원천적 개인들’로 귀결되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감을 만들었다. 하지만 왜 좌절해야 하는가? 정말로 왜 좌절해야 하는가? 못 견뎌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절대화하는 순간, 그것은 죽음으로의 충동, 타나토스로 향한다. 그러한 지반에서 그를 구원하는 것은 다른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신에게 귀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고골과 도선생이 끝내는 그러했던 것처럼. 고골이 '광인일기'를 쓴 것과 도선생이 '미치광이에 의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쓴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그들은 미쳐서 돌아버릴 것 같은 고립감을 느꼈고 신의 품만이 삶을 구할 길이었다. 그들이 구한 것은 분명 전과는 다른 삶이겠지만.





하이고 뭔가 또 과제를 남기는 마무리- _ -

에이, 완결이란 없어요, 완결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