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6 / 2012년 가을학기 주제학교 / 도스토예프스키[지하로부터의 수기] / 이기원

 

이것은 어째서 삶이 아니란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아름다운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난 시간에 보았던 '수정궁' 정도가 되지 않을까? 배운 대로 열심히 실천하며 좋은 것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 말이다. 모든 사람이 이상적인 세계를 바라고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세상은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문명이 도래한 이후에도 왜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일까?

 

잠깐 주위를 둘러보아라.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마치 샴페인처럼 즐겁게 흐르고 있다. 문명은 인간 안에 단지 감각의 다양성을 발달시킬 뿐이다. 그리고 절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들의 발달에 의해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피를 보는 것에 쾌락을 찾는 데까지 도달한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어쨌든 문명 때문에 인간이 피에 더 주리게 되지는 않았더라도, 전보다 더 나쁘고 더 혐오스러운 방법으로 피에 주리게 된 것은 확실하다. (39)

 

인간은 다양한 곳에서 쾌락을 찾는다. 남의 고통을 보며 쾌락을 느끼기도 하고, 복수를 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불행이 어떤 이에게는 이익(쾌락)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피를 보는 쾌락의 방법은 다양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피를 보는 게 '좋다', '나쁘다'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수정궁에서 살고 싶어할 것이라는 것은 체르니셰프스키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신사 양반, 이성이란 훌륭한 것이라고. 이것에 관해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의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켜 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삶의 이성과 모든 당혹감을 포함하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종종 이런 표현으로 인해 꽤 불쾌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삶이며 단순히 제곱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예로 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살기 위한 나의 총체적인 능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싶지, 살려는 나의 총체적인 능력의 사소한, 아마도 20분의 1에 달하는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성이 무엇을 아는가? 이성은 단지 그것이 배우도록 되어 있는 것만을 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반적으로 그 안에 포함된 그것이 획득한 모든 것에 의해서, 실수도 하지만 살아가고 있다. (46~47)  

 

그렇다. 이성적인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살기 위한 총체적인 능력'은 이성적인, 합리적인 행동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계획한 것을 뒤엎기도 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이런 모순적인 행동들이 다 가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지겠는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외투>의 아까끼 아까끼비치와 같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는 유령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작가가 모순만을, 고통만을 삶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는 '평안만을 좋아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꼴사납다'고 말한다. 삶은 고통이냐 평안이냐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변덕을,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할 때 평안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점들을 증오할 뿐이다.

 

나는 동의한다. 인간은 월등하게 창조적인 동물이며, 의식적으로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도록 그리고 기술의 미학을 연마하도록 선고받았다. ,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길이 어디에 이르든 간에 그것을 개척해야 한다. 아마도 인간이 때때로 옆길로 벗어나고 싶은 바로 그 이유는 정말이지 그가 그 길을 개척하도록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아무리 어리석다 할지라도, 그 길은 결과적으로 거의 항상 그 길이 인도하는 어디에라도 도달하게 될 것이고, 중요한 점은 그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단지 그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53)

 

인간은 창조하고 개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파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파괴를 좋아한다는 것은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목표만을 위해 산다면 목표를 이룬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삶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만약 삶이 2X2=4와 같이 딱 맞아 떨어진다면 그것은 죽음이나 다름 없다고 한다. 왜 일까?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 개척의지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답이 이미 정해진 삶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2X2=5 또한 삶에서는 사랑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목표를 향해 가는 무수한 과정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