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3 / 2012년 가을하기 주제학교 발제 / 도스토예프스키[죽음의 집의 기록] / 이기원

 

죽음의 집에서 피어난 삶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그 다음해인 1855년「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까「죽음의 집의 기록」은 상상의 산물이기는 하나,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사실 그의 작품 중에서 그다지 이슈를 불러모으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경험과 「죽음의 집의 기록」은 훗날 그의 대작으로 알려지게 될 「죄와벌」이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쓰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옥에 있는 도둑들 가운데서 나는 4년 만에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은 믿겠습니까? 여기에는 깊고도 강하며 아름다운 성질이 존재합니다. 거친 외모 속에서 황금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한 사람도 두 사람도 아닌 많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존경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진정 아름다운 사람도 있습니다. (p78, 도스토예프스키 평전, EH )

 

감옥에 들어가긴 전과 나온 후 그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그가 급진적인 서클에서 농노제폐지, 가족제도폐지, 이상국가 건설 등을 토론했을지언정 그것은 민중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지적 허영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 시절 그의 작품 또한 센티멘탈(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신분적 차이로 인해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것이 주 내용)류 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대다수의 죄수들이 민중이었다. 민중이란 신분의 제약으로 단순히 불행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감옥 안에서 생생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 불멸의 증거

감옥에 들어오는 이유는 가지가지이다. 사람을 죽인 죄, 건강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은 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죄 등등 죄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이들이 진짜 인간 이하로 살고 있을까?

 

죄수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감옥에 오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배워서 뒤에는 훌륭한 장인이 되어 세상에 나가곤 했다. 여기엔 장화공도, 단화공도, 재봉사도, 목수도, 열쇠공도, 재단공도, 도금사도 있었다. (p35, 죽음의 집의 기록)

 

놀랍지 않은가? 죄수들 스스로 기술을 연마하다니. 죄수들이 단순히 '불행할 것'이라는 생각은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죄수들은 감옥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서로를 파멸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는 그들을 파멸시키지 못한다. 죄수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몽둥이 밑에서 의무적으로, 강제적으로' 노동을 할 때이다.

 

옥사가 잠기고 나자, 우리 옥사는 갑자기 어떤 특이한 모습을 띠었다. 진짜 집, 가정과 같은 모습 말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죄수들과 나의 동료들을 집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p98, 죽음의 집의 기록)

 

귀족계급이었던 주인공은 대다수가 민중이었던 죄수들 사이에서 적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느새 감옥이 집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옥을 나가면 '이 방구석에 연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것에 익숙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 단순히 평민들만이 자신의 환경과 비슷한 감옥이라는 곳에 익숙해지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고통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감옥이 인내를 배우기 좋은 장소인 것도 깨달을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것이다.  

 

이성과 제도에 대한 회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가치 체계가 무너지면서 인간이 가진 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인간의 이성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는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죄수들은 공민권(시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만은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법에 의해서 권리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허구일지도 모른다. 법에 의해서 주어진 권리는 언제든지 법에 의해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것은 언제 법적 테두리를 전제할 때 가능하고 그것의 외부는 그저 '범죄행위'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건강 증명서가 없어서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어떠한가? 건강 증명서라는 것은 아마도 '일하는 데 전혀 지장 없음'을 나타내는 공문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증명서 제도가 없었던 시절 이 사람은 길거리를 다니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 사람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것은 건강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감옥에 오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법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봐 스스로 잘 생각해 보게나. 자네도 사리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도 인간으로서 너 같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부드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정말 옳은 말씀이십니다, 각하." "그래,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그러나 중요한 건 법이야. 내가 아니야. 나는 하느님과 조국에 봉사하는 사람이야. 만약 법을 어기고 너를 적당히 봐준다면 죄를 짓는 거야. 이 점을 잘 생각해 보라고."(300)

 

모든 죄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령이 한 말이다. 그는 법의 이름으로 죄수들을 심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은 상당히 모호하다. 스스로는 자비를 베풀고 싶지만 법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웃으면서 죄수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인가. 법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죄수들이 뇌물을 바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뇌물을 받은 경우 태형을 집행할 때 처음에는 세게 때리는 것이 불문율이고, 그 다음부터는 약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법 자체, 그것을 만든 인간의 이성 자체를 의심해 볼 수 밖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주인공이 처음 감옥에 갔을 때 마주한 광경 중 하나는 죄수들끼리 서로 모욕을 주며 싸우는 장면이었다. 여차하면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질 기색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지켜볼 뿐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료해질 때 스스로 '놀 꺼리'를 찾는다. 상대방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일종의 놀이이다. 그것은 죄수들이 모두 무기력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죄수들이 '죽음의 집'에 있긴 하나, 이들도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들 스스로 주목을 받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거기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감옥에서 맘껏 펼치거나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평민들은 감옥 바깥에서는 단지 귀족들의 수족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연극을 준비하고 상연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세 대의 발랄라이까가 있었는데, 모두 손수 만든 것이었다…. 음조, 취향, 연주, 악기를 다루는 법, 곡조 표현의 특징, 이 모든 것은 죄수들만의 독창적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때까지 이렇듯 단순한 민중 악기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일말의 이해심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소리들의 화음, 연주의 호흡, 그리고 특히 모티프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재연과 그것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신들은 그저 놀라움만을 안겨다 줄 뿐이었다.(249)

 

죄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민중들도 '정신'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읽고 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감옥 밖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정신을 어떻게 감옥 안에서는 발견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가 민중을 이해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귀족들 중에서는 끝까지 동료를 만들지 않고 외롭게 지내는 경우도 있다. 간수들 중에서도 죄수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죄수들의 존경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간수의 신뢰가 죄수들을 유쾌하게 만든다. 죄수들은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독수리처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사랑한다. 또한 그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그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로 가고야 마는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민중을 발견한 것이다.  

 

"여긴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오." 나에게로 거리낌없이 다가오면서 꿀리꼬프가 말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잡아서 대열로부터 끌어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일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당신은 여기서 할 일이 없습니다. 어디든 가서 좀 기다리시오저기 취사장에 당신의 동료들이 있군요. 저리로 가시오"(402)

 

감옥에서 나오는 음식이 점점 형편없어지자 죄수들은 소령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혁명의 예언적 성격이기도 했다. 귀족들의 힘이 아닌, 민중 스스로 일궈야만 하는 과업인 것이다. 비록 봉기는 쉽게 겁먹은 사람들에 의해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소령에게도 어느 정도의 압박을 가한 결과를 가져왔다. 죄수들이 모였을 때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들은 어떠한가? 오히려 귀족들은 노역에서도 밀릴 만큼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따짐으로써 서로 단결하지 못하는 존재들에 불과했다. 이처럼 '죽음의 집'은 이전의 가치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가치들이 만들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죽음 후의 삶

주인공은 형기를 마치고 다시 '나리'가 되어 '죽음의 집'에서 자유의 땅으로 나왔다. 그런데 정말 그가 자유를 얻은 것일까? 소설 마지막에 그가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를 외친 것과는 달리 그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단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며 그 외의 다른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집 안에만 있었다.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유를 얻은 후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 이 아이러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보통 주인공이 감옥에서 나와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작가는 막연한 희망을 거두어 버렸다. 죄수의 탈옥에 잠깐 환호했다가 실패한 후에 무감각해지듯. 감옥에서 그가 외쳤던 자유, 새로운 생활, 부활은 없었다. 감옥 밖의 세상에는 여전히 절망스러운 현실이 있을 뿐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10년의 인내의 세월을 뒤로 한 채 결국 3년 만에 그렇게 다른 길(죽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