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대중지성 62012, 9,27

박정복,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

변신, 시골의사

바이얼린, , 문지기

 

작년에 카프카의 사진을 A4 용지 한 장으로 가득 크게 본적이 있다.

검고 큰 눈이 부담스러워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엑스 레이 선이 신체 내부를 얇은 필름속에 검고도 투명하게 담아내듯 그의 눈은 인간 심연의 그 무엇을 그대로 투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렌즈에 막바로 찍힐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진 이미지에 먼저 압도되어버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 보니 등껍질이 딱딱한 벌레로 변해 있는 청년, ‘그레고르 잠자’. 그의 직업이 보험국 외판사원이고 빚을 진 아버지를 대신하여 인질처럼 가장역할을 하고 있으며, 분초를 셈하며 닦달하는 사장과 하수인들에 둘러쌓여 있다는 설명을 안내받지 않더라도 장갑차처럼 딱딱하다는 등껍질에서 겹겹이 쌓여온 고독과소외의 적층을 감지할 수 있다.

가족들의 경악과 충격마저도 시들해지고 그를 시중들던 누이 까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그를 방치하게 되면서 철저히 자신의 방에 유폐되어 허우적거리는 가느다란 다리 몇 개로 기어다니는 것 조차 힘들게 여위어갈 무렵, 뜻밖에 그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누이의 바이얼린 소리. 거실까지의 그 머나먼 길을 가족들의 냉대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힘든 줄도 모르고 가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p66)

그는 자기가 자기의 방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먼데 놀랐고 어떻게 조금전에 자신의 허약한 몸을 이끌고 같은 길을, 그러한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왔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p72)

 

어느 철학자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경지를 지향한다.’라고 말했었다. 음악은 표현수단인 음(소리)과 작품에 간극이 없는 장르라고 한다. 그래서 음악은 불안과 소외에 경직된 우리의 마음을 위무해 줄 수 있다는 것. 음악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와 하나로 존재한다. 책을 보면서 말을 하거나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음악을 들으면서는 다 가능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벌레앞에서 연주는 계속될 수 없다. 누이에게 그는 변신한 오빠가 아니라 흉악한 몰골의 벌레였을 뿐이니까.

 

삶의 고통은 이렇게 끈질긴 것일까? 황제의 전갈을 받은 사자는 아무리 달리고 장애물을 뛰어넘어도 마지막 지점에 있는 침전물이 높다랗게 퇴적된 왕도를 통과할 수는 없다. 원숭이는 원숭이기를 포기해야만 출구를 찾을 수 있으며 시골의사는 지상의 마차에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을 메어야 하며 자신은 마차를 출발시킬 수 없고 마부만이 그것을 명령할 수 있다. 죽음에의 집착을 노끈처럼 길게 늘이고 실패처럼 감고 다니는 오드라덱은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어 잡히지 않는 것이며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도 틀림없이 우리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결코 부대껴 마모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한 번 더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진인간을 구원해 보기로 하는데 그것은 이었다. 하지만 법앞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다. 문은 하나가 아니어서 몇 개를 더 통과해야 하지만 시골사람은 바깥문조차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문지기 때문이다.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써가며 일생을 보내지만 문지기는 결코 그를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지기 곁에서 늙어 이제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야 그는 비로소 알게 된다. 그 문지기가 바로 였다는 것을.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