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8. 고미숙 선생님 특강 @공플

생각해보면 내 뜻대로 된 적은 없었는데, 유학의 영역에 있는 고전을 만나면서도 불교나 도교와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정화 스님 말씀을 듣고, 공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근대 서양 학문에서는 지식이 소유와 증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스님은 깨달음의 영역에서 공부를 설명하셨다. 공부는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선 덜어내야 한다!

도교의 영역에서 만나는 사주명리학은 진리성과 실용성을 갖추고 있는데 지성의 장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역술계 종사자만 30만 명, 그곳에 들어가는 돈이 연간 4조원에 달한다. 가까이에 있는데 활용되지 못하는 지식임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운명을 보는 틀을 발견했다. 물건과 이별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물건은 마치 제 갈 길을 간다는 듯이 사라져버린다. 지갑도, 핸드폰도. 모든 것에는 생로병사의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의 다른 조합이 50만 개나 된다. 이렇게 다른 리듬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밀도(intensity)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면서 바뀐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복잡한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하게 됐다. 불교와 도교를 접하게 되고 책까지 쓰게 된 것은 준비해서 지식의 세계로 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왕초보의 세계에서 가다보니, “이게 있네!” 하고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몸하고 부딪치는 사건이 있었다.) 둘째, 한 가지로 꿰는 구슬을 신비롭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진리는 신비롭고 고원해서 도달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 역사, 혁명, 유토피아 등. 역사는 뭔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가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명리학을 배우면서는 음양이 있고, 기운들의 밀고 당김이 있다는 생각. 다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사람의 몸, 사람의 관계, 조직에도 말이다. 예전의 공부법은 그저 결핍을 채우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공부를 하면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사람이 늘어서 공부가 더 잘 될 거라는 인과의 사슬이 해체되었다. 인과의 사슬이 지켜지는 사회는 아주 작은 사회일 것이나 사실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나는 마일리지 쿠폰을 미워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뭔가 챙기면 이익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쌓으면 안 된다. 인과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원망하거나 자책하거나 혹은 집착하거나 냉소할 뿐이다. 하지만 삶이란 것은 인과의 사슬 없이! 리듬을 밟아가며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자율성이다. 긴장과 자기 영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깨진 것은 다 삐쳐서라는 결론을 얻었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게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깨달았다. 어떤 관계로 이 지식을 대하는가,하는 지식에 대한 근본적 태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변용만 생각했는데 모든 것은 생성-소멸된다.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초식에는 나-식상-재성-관성-인성이 있다.

 

식상은 밥과 말이다. 성욕이나 아이디어, 자식도 여기에 해당한다. 식상이 발달해야 머리가 좋다. 단 이 힘을 제어가 안 되는 힘이다. 식상이 많으면 아무하고나 친해지고 놀기도 좋아한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식상은 관성을 극하므로 밥을 많이 먹으면 남자친구가 안 생긴다. ㅋㅋ)

 

재성은 유형적인 것이다. 일복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헌신적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워커홀릭! 돈을 많이 벌어도 멈춰 있는 사람들이다. 일을 해도 연봉만 챙긴다. 자본주의는 재성까지만 쓰게 세팅을 했다. (예전에는 학교가 담당했는데) 현대에는 관성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관성까지는 오지도 않는 현대인의 사주를 생각해보면 자기가 생해주는 식상이나, 비겁이 파극하는 재성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관성은 사회적 관계이다. 일을 하면서도 (연봉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3, 4차까지 술자리를 챙기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까지 오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는 정치가가 대표적이다. 관성까지 머물면 패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 관성이 고립된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자살을 한다. 가족만 소중한 사회의 병폐다. 왜 가족이라는 걸로 한정시켜뒀나? 관성이라는 조건 안에 들어가야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앙띠-오디이푸스!

 

인성은 부모에 의존하는 기운이라서 마마보이가 많다. 그리고 박사가 많아진다. 자기가 배운 것에서 허우적댄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지성 안에서 가능할까? 근대는 종교의 영역을 빼 놓고 공부의 영역을 구성해 두었는데 그나마 기술지만 남게 됐다. 대학 외 평생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인성(그냥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교양의 영역에 묶어 놓으면 순환이 되질 않는다. 모든 지식은 스마트폰을 통해 오픈되어 있으므로 이제는 어떻게 활용하느냐만 남았다.

 

인성을 보며 든 생각은 모든 존재는 공부해야 하는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지금까지 지식은 전문성의 영역이라고, 교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왔다. 근본적인 우월함이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가르치고, 어디까지 배우나? 공동체에서는 직장을 그만 두고 공부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초식의 구성을 보면 살아 있는 공부가 모든 존재의 보편적 삶의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 기술지나 전문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생사의 길을 여는 지성 말이다. (인성을 나를 생해주는 기운이므로) 모두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

오행을 모두 갖춘 사람은 행복하냐, 그렇지 않다. 겉보기에는 순환하지만 팽팽하게 극,하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찌그러져 있다. 이러한 오행의 리듬을 아는 것이 내가 태어난 조건을 아는 것이고 또한 각자의 출발점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건 언젠가 나를 죽일 사람들의 명단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이별 살인이 늘어나고 있다. 관계를 만들 때는 (서로가 자신의 쾌락에 굴복하는 삶이란 걸 인식하며) ‘생존의 전략을 짜야 한다.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했다고 하는 전제는 근대가 설정한 것이다.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어떤 조건에 의해서 결정될 때가 많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사실상 반은 충동으로 무언가를 결정한다. 공간에 따라 시절운이 정해진다. 자기가 자기를 놓칠 때 일어나는 사건들로 만난다. ‘어찌할 수 없음이란 조건은 어떻게 보면 능동적인 것이다. 조건을 이겨먹지 않으면 끌려다닐 뿐! (돈 쓰는 회로만 바꿔도 인복이 바뀐다.) 우주는 균형이란 것이 없다. 최소한의 항상성 안에서 좌충우돌 할 뿐인데 바로 이것이 살아 있음이다.

딱 한 가지! 이것만은 내 힘으로 관통한다, 이것이 삶이다. 고전에서 배우는 창조의 기운. 멘토를 찾고, 멘토와 교감하라. 정보로서 배우면 안 된다.

 

Q. 태어난 시를 몰라도 알 수 있나?

A. 시지를 모른다는 것은 노년의 운()을 모른다는 뜻. 대운의 흐름만 알아도 많이 알 수 있다. 공부는 힘들 때 해야 효과가 있다. 정관은 비겁을 정직하게 압박한다. 이 순간을 함부로 안 보내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Q. 내가 바뀌면 정말 세상도 바뀌나?

A. 내가 바뀌면 바뀐다. 개인과 사회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사회의 리듬에 내가 따라한다. 내가 뭘 하려면, 주변 사람과 치고 박고, 치고 박고 해야 한다.

 

Q. ()가 여덟인 사주?

A. 지구력이 많은 만큼 고집도 세다. 리더십과 지배욕, 일복과 재성은 한끝 차이다. (허나, 누구나 그러니까 찌질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보통은 중 사주라고 한다. 다 가지려고 하면 다 파괴한다. 자식에게도, 재물도, 남편에게도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무리] 명리학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공부를 통해 내 안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의 지점이 고민이 될 것이다. 물음이 있을 때 공부가 된다. 오행이 있다는 건 오행이 다 막힌다는 뜻인데 자기도 안 아프지만 타인과 공명도 못 한다. 아파야 괴로워야 공부가 된다. 아픈 데서 시작해야 한다. 거품을 걷어내라! 버리면 내가 쓰러질 것 같은 그것이 뭔지? 하고자 하는 것이 막힐 때? 대운은 지표가 된다. ,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만큼의 순환을 이루려면 사람과 공부해야 한다. 스승과 도반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명리학은 일종의 메타인생론이다. 길흉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