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라, 살아서 싸워라

                                                                                                                     수경

 

 서기 2000년에 개봉된 《배틀 로얄》이라는 일본영화가 있다. 영화 속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두 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기관총과 수류탄을 들고 돌아다닌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좀 빤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에서 충격적인 점은, 아이들이 급우의 손에 쓰러질 때마다 자막으로 뜬 사망자와 생존자 수다. 사망자 ○○명, 생존자 ○○명. 죽고 죽이는 장면을 뉴스보도처럼 보여주는 이 장치 때문에 관객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게 된다. 지금껏 나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내가 생체 실험실의 뻔뻔한 참관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요즘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뉴스들을 볼 때면, 나는 《배틀 로얄》의 두껍고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 다시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지금 십대들은 그야말로 전투 모드다. 바깥에서 벌이는 전투가 왕따 현상이라면, 제 안에서 벌이는 전투는 자살 충동이다. 지금도 너무 많은 아이들이 떨어지는 중이다. 80년대에는 이십대 청춘들이 정권과 제도에 저항하며 싱싱한 제 몸을 던졌더랬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죽음의 행렬에는 이제 십대들이 있다.

 

성적 비관, 학교 폭력, 양친 문제. 뉴스에서 보도되는 자살 이유들은 대략 이렇다. ‘저런 걸로 죽을 것까지야’ 싶을 수도 있지만, 당사자는 그게 아니다. 지난 중간고사를 망치는 바람에 처음으로 10등 밖으로 밀려난 아이는 심기일전하여 밤 10시에 하교해 새벽 2시까지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건만, 기말고사 결과는 16등이다. 이럴 때 아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다. 매체들은 이를 제도의 문제로 보고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아이들은 떨어져 내린다.

 

기원전 3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장자(莊子)』라는 책이 있다. 이 중 한편에는 아주 많은 ‘불구자’들이 등장한다. 누구는 외발이고, 누구는 곱사등이고, 누구는 사람들을 기절시킬 정도의 추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기는커녕 누구보다도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누린다. 예컨대 외발이 왕태는 형벌로 발 하나를 잘린 사람인데, 그를 따르는 자들의 수가 공자의 추종자 수와 맞먹는다. 대체 왜? 공자(로 분한 장자)의 답은 이렇다. “죽고 사는 것이 큰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꿈쩍하지 않는다.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변천에 요동하지 않는다. 사물의 변화를 운명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장자』‘덕충부’)

 

왕태와 달리 우린 참 연약하다. 우리가 흔들리고 아픈 이유는 바깥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 입시 지옥, 왕따 현상, 이런 것들을 탓하면서 때론 휘둘리고 때론 도망가면서 사는 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중심이 없어서다. 이렇다보니 외부적 힘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한 방 얻어맞으면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너무 아깝지 않나. 당신이 태어나기까지 필요했던 그 모든 우주적 조건들이 무화되는 것이. 당신의 피와 숨에서 지금도 솔솔 피어나는 생명의 에너지가.

 

당장 마음이 아려 눈물이 쏟아지고, 겁에 질려 온몸이 떨리고, 분노 때문에 눈앞이 온통 새빨개질 때 장자의 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생각을 멈춰야 한다.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무엇)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판단 중지, 행동 중지! 오히려 깊게 심호흡을 하는 게 낫다. 그런데 이토록 급박한 순간에 그럴 수 있으려면 역시 평소에 좋은 공부를 해야 한다. 다른 것에 의탁하는 공부, 끼워 맞추는 공부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힘을 기르는 공부를. 장자는 이를 심재(心齋)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공부. 왕태를 비롯한 『장자』의 불구자들은 바로 심재의 대가들이었다. 왕태는 심재를 통해 외부의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존재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우주는 결단코 당신에게 끝을 앞당기길 권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 제발 넋 놓고 있지 마라. 세상 욕만 하고 앉아 있지 마라. 허약한 몸과 마음 때문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지 말아 달라. 어떤 충격이 와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길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