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친구 아이가! - 사마천, [사기열전]

 

 

최 정 옥(남산강학원 연구원)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를 아무 사심 없이 들어주고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우리는 어쩌면 애완견이나 아이팟, 곰인형 같은 친구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정작 현실은 어떠한가.

 

신학기가 되면 청소년은 어김없이 아프다. 학업 진도를 따라가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새로 친구를 사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친구 만들기는 인맥 쌓기이자 스팩의 일종이다. 트위터 친구, 페이스북 친구, 블로그 친구는 기본. ‘깔맞춤’하듯 인맥과 라인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친구다. 악세사리처럼, 나를 빛내줄 존재. 하지만 청소년에게 친구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학교에 죽이 맞는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학교가 싫으냐 좋으냐를 결정하는 요소다. 마음 편히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다면 학교 가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 된다.

 

다행히 그럭저럭 어울려 다닐 무리 속에 들어갔다 해도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가끔은 꾹 참고 ‘빵셔틀’도 해야 하고, 들러리 노릇도 해줘야 하고, 때로는 과도한 리액션도 필요하다. 무슨 얘기를 할라치면 눈치를 보기도 하고, 치고 들어가며 깐죽대기도 해야 한다. 특별나게 모나지 않게, 싸우지 않고 적당히 적당히. 끼리끼리 모여 두루뭉술하게 학창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면, 친구로 충분한 걸까. 친구라는 게 그저 함께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일까. 집단 따돌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학교자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실에서, 인생의 둘도 없을 진정한 절친을 찾겠다는 건 사치에 불과한 걸까. 대체 지금 우리에게 우정이란 건 뭘까.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한, 신변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 혹은, 이른바 ‘일진’들의 패거리의식을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붕우유신(朋友有信)! 우정에서 중요한 덕목은 신의(信義)다. 믿는다는 건 무엇인가. ‘믿음’, ‘의리’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조폭영화에 나올 법한 ‘마초적 의리’, ‘사나이들의 우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믿음에도 차원이 있다. 공자는 개개인의 소소한 안녕과 이익을 위한 하찮은 의리를 ‘량諒’이라고 하여, ‘신(信)’이라는 글자와 구별해서 썼다. 사귐에도 소인의 사귐이 있고 군자의 사귐이 있는데, 전자가 ‘량諒’이라면 후자가 ‘신信’이다. ‘신(信)’으로 표현되는 믿음은 상대에 대한 나의 사심을 뛰어넘어 상대의 뜻을 알아주고 그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귐의 대명사가 바로 관중과 포숙의 사귐, "관포지교管鮑之交"다.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더욱 곤궁하게 하였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사마천, [사기열전])

 

포숙이 관중의 ‘이기적 행동’을 용납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일 수 있는 재목임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친구간의 ‘신의’란 이런 것이다. 서로의 뜻과 꿈을 공유하고, 서로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 우리는 모두 포숙과 같은 친구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군가에게 포숙이 되고자 하지는 않는다. 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라. 관중에게 포숙이 그러했듯이, 상대의 뜻과 능력을 자기의 것처럼 믿고 지지해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