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중국의 거대한 전통과 맞서다

 

최 정 옥(남산강학원 연구원)

 

 

1898년, 루쉰은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향 샤오싱을 떠났다. 집을 떠나는 집안의 장남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8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우셨다.“ 어머니의 울음은, 기울어진 가세에 더 이상 과거공부를 시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갈 곳을 찾지 못한 몰락한 선비인 아들에 대한 걱정과 가여움을 담고 있었다. 사실 루쉰의 어머니가 이렇게 서럽게 운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경서經書를 배워서 과거를 치르는 것이 정도正道였고, 사회통념상 소위 양학洋學을 배운다는 것은, 갈 곳 없는 사람이 서양 오랑캐에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간주되어, 몇 배의 수모와 배척을 당해야만 했기"([납함, 자서]) 때문이었다. 1898년, 루쉰은 18세가 되는 해에 새로운 길을 찾아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1. 익숙한 모든 것에서 떠나기

루쉰魯迅의 본명은 저우슈런周樹人(1881-1936)으로, 저장성浙江省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저우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었으나, 과거시험 부정을 꾀했다는 이유로 조부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독서인 집안은 이로부터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으로 재산은 탕진되었다. 집안의 장남인 루쉰은 철들고 나서부터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가시자 자신들을 차갑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다.

루쉰에게 고향 샤오싱은 자신을 얽매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샤오싱은 중국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전통적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고향은 흡사 고인 물처럼, 현재의 도살자들로 가득했다. 루쉰이 소설가로 발을 내딛으면서 말했던 "철로 만든 방"은 결코 은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방은 철로 만들어져 깨부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질식사를 기다리듯 그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루쉰은 철방에서 홀로 잠을 깬 자였다. 그는 평생을 거쳐 철방 속 적막을 느꼈고, 그럴 때만다 사회활동에 더 매진했고, 때로는 옛 문헌 속으로 파고들었다. 루쉰은 철방과 같은 고향을 떠났다. 흡사 지금까지의 자신과 결별하듯, 탯줄을 스스로 자르듯이 또는 도망치듯.

자신을 짓누르던 전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 루쉰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진화론"이었다. 1901년, 루쉰은 옌푸(嚴復)의 [천연론(天演論)]을 통해서 "생존경쟁"과 "자연도태"라는 용어에 접했다. 당시 진화론은 생물학적 다위니즘을 비롯해 사회 다위니즘, 상호부조론 등이 서로 섞인 채 중국에 물밀듯이 들어왔다. 진화론은 중국은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을 지식인에게 안겨주었다. 지식인은 진화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을 근대 세계와 같은 궤도에 두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하고자 했다. 루쉰 등의 세대에게 진화론은 일종의 돌파구였다.

처녀작 [광인일기](1918)에서 루쉰은 중국 전통의 예의와 도덕의 해악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며, “아이들을 구하라”고 외쳤다. 자신과 같은 기성세대는 "인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암흑의 수문을 어깨로 걸머질" 터이니, 아이들은 자신들을 밟고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이다. 스스로를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으로 규정한 루쉰이었다.

 

 

2. 의학에서 문학으로 : 중국인의 열근성을 낱낱이 해부하다.

1902년 루쉰은 국비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의화단사건(1900)에서 승리한 서구 8개국연합국들이 청나라로부터 받기로 한 배상금을 청나라가 해외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한 일에 전용하기로 한 덕분이었다. 일본에 간 루쉰은 망설임 없이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부친처럼 어리석은 처방과 치료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쉰에게 의학은 진화론처럼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었다.

하지만 의학에 대한 확신은 한 장의 필름으로 인해서 깨어졌다. 이른바 환등기사건. 루쉰이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시기는, 바야흐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시간 틈틈이 선생들은 환등기를 틀어주었는데, 루쉰은 어느 날 일본에서 고향 사람들과 만났다. 당시 루쉰이 본 환등기 필름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스파이 혐의의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다. 이들을 둘러싸고 건장한 체격의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멍청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변발을 하고 있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양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국인 사진을 보고, 루쉰은 충격에 빠졌다. 그 후 루쉰은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의대를 그만뒀다. 의학으로 구국을 하겠다던 루쉰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납함], 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루쉰은 의학 대신 "문예"를 택했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펜으로 "중국인의 열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 루쉰은 신체에 깃든 병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치료하듯, 글을 썼다.

그렇기에 루쉰의 글쓰기는 중국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한 치의 위로도 없는. 가령 새것조차 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사유방식, 그것을 기초가 되는 철학, 사상, 신화, 예술, 고전을 모두 비틀었고, 총공격을 가했다. 전통의 해독害毒에서 청년들을 지키기 위해 고문은 읽지도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것은 모두 탁자 하나를 옮기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중국의 너무나도 견고한 전통과 인습에서 거리를 두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3. 전통이라는 거대한 뿌리에 맞서

루쉰은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는 3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 뿐이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루쉰은 잡문쓰기에 치중했다. 지금의 에세이에 해당하는 잡문은 현실에 대한 강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한다. 루쉰의 붓끝은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서 군벌들의 난립과 폭행, 국민당의 백색테러뿐만이 아니라, 혁명을 팔아먹는 지식인, 현실의 권력에 굴복하고 정인군자正人君子인체 하는 지식인을 향해있었다.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 및 정신승리법을 비판하고, 혁명에 들뜬 청년들의 조급증을 논파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비수이자 투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루쉰의 글쓰기는 자신을 부정하고 해부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황금시대로 아이들을 넘겨주는 중간물이자 꽃을 키우기 위한 거름으로 자신을 규정한 루쉰은 새롭게 도래할 혁명의 시기에는 멸망될 운명의 존재였다. 미래세대의 독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신체에도 새겨져 있을지 모를 중국인의 열근성과 대면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만큼, 루쉰은 시대와 사회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쓰여진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만 열이 몹시 날 때면 유럽인들은 임종시에 흔히 남이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을 바라며 자신도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지낸다는 사실이 기억날 뿐이다. 나의 적과 원수는 적지 않은데 신식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생각해보고 나서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증오하게 하라. 나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죽음])

루쉰은 죽으면서까지 무력으로 중국을 농단하는 제국주의 적들과 군벌들, 위선적인 지식인들, 그들을 뒷받침하는 과거의 부정적인 것들을 향해 겨눴던 창끝을 거두지 않았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시기를 살았기에 두 세계의 어둠을 볼 수 있었던 루쉰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암흑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중국의 역사를 뒤집는 일, 중국인의 혈관을 흐르는 피를 바꾸는 일, 즉 혁명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루쉰은 죽으면서도 모든 익숙한 것들, 자신을 위로하는 것들에 속지 말라고, 투쟁하라고 외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