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하는 금요일]

  남산강학원 박수영+백요선 씀. 이번 낭금의 튜터인 수경샘을 인터뷰 했습니다^.^

 

 

 

우리들의 '셰익스피어 '를 만나자!

 

 

 “아, 로미오, 로미오 님. 왜 이름이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잊으시고 이름을 버리세요. 아니 그렇게 못하겠다면 저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해 주세요. 다른 이름이 되어주세요. 몬테규라는 이름이 뭐람. 신체의 어떤 부분도 아니잖아요.”

 

로미오줄리엣.jpg  

 

  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대사입니다. 낯익은 문장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이 장면에 대해서, 이들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걸지도 모릅니다. 

 

“줄리엣은 단순히 말 잘 듣는 중세 귀족집안 딸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사랑으로 인해 무한한 에너지를 발휘함으로써 한 여인이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세상에 서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거죠. 자기의 이름, 명분, 외부 규율을 모두 버리고 사랑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여인. 이것이 줄리엣이 보여주는 혁명성이에요. 사랑의 힘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환하고 기분 좋게 비춰주는지는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만 확인할 수 있겠죠.”

   

  오호?!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해 우리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전혀 모르기도 합니다. 너무 유명한 탓에 읽지 않아도 다 아는 것만 같다는 게 고전문학의 비극인 거죠! 때문에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비극에 대해서도 그저 최루성 신파거나, 허무한 비극 — “뭐야, 결국 다 죽는 거잖아!” —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것 같고요. 이번 낭금에서는 그 셰익스피어를 다시, 아니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볼까 합니다.

 

 

   1  비극의 끝판왕을 다시 보자

     /비극에서 명랑성을 읽는다고?!/

   이번 셰익스피어 읽기에서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비극’입니다. 그런데 비극이라니요. 제게 비극은 그저 한 인간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어떻게 운명이 그를 집어삼키는지에 관한 이야기랄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과는 달리 비극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니요.

 

  “단지 슬픈 이야기는 최루성 멜로거나 신파지 비극이 아니지요.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숭고함’이 부여되어야 해요. 가령 고대 그리스 비극을 생각해 봐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주인공은 역시 그저 운명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알고서도 끊임없이 넘어서고자 했어요. 니체식으로 말하면 주사위를 계속 위로 던진 사람들! 신이 되지 못하지만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들! 그럼으로써 주인공은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는 거죠. 물론 끝내 그 한계를 넘지 못했기에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 지난한 여정을 통해 고귀해진 인간의 삶을 우리는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저 고대 영웅들의 숭고함이 연결되진 않습니다. 사실 햄릿만 봐도 모두 다 죽고 끝나버리는데.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주인공들인 햄릿이나 맥베드 역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마침내 숭고해지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아주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독자에게 ‘다음’을 요청한다는 거예요. 햄릿도 로미오와 줄리엣도 모두 죽지만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에요. 햄릿이 본 진실은 호레이쇼와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지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 이후에 원수였던 가문들은 화해를 해요. 즉, 모두 다음 스텝을 밟기 시작하지요.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이렇듯 멸망이 아니라 다음 생에의 비전을 예고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어요.”

 

햄릿_Eimuntas Nekrosius연출, Meno Fartas극단.jpg  아직까지도 아리송한 관계로 실제 장면을 좀 미리 보도록 하지요. ‘결국 모두 다 죽고야 마는 비극의 끝판 왕’ 햄릿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왕과 왕비가 먼저 죽고 이제 햄릿마저 죽으려 합니다. 이에 그의 절친이자 충신인 호레이쇼 역시 그를 따라 자결하려 하지요. 그러자 햄릿이 저지하며 말합니다.

  

 

  “호레이쇼, 나는 죽네. 가엾은 어머니, 안녕히! 이 참변에 파랗게 질려서 벌벌 떠는 여러분들, 이 비극의 무언 배우나 관객밖에 못 되는 여러분들! / 죽음의 잔인한 사자가 사정없이 나를 붙잡아 가는구려. / 아, 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시간이 없구나. / 호레이쇼, 나는 가네. 자네는 살아남아서 나의 입장을 올바르게 설명해 주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자, 이 문장을 비롯한 의미심장한 문장들로 가득 찬 『햄릿』을 보고자 하신다면, 10월 5일 시작하는 낭금으로 컴온~ 

 

  (Meno Fartas 극단의 <햄릿>)

 

 

 

   2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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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거 알아요?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거. 셰익스피어는 16세기 영국의 극작가였을 뿐입니다. 당시 동사무소(^^)가 제대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고귀한 신분이었던 것도 아닌지라 그가 남긴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에 관한 일체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죠. 그의 이름이 Shakespeare인지 Shaxpere인지 Shaxberd인지도 몰라요. 그가 쓴 편지나 일기조차 없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셰익스피어를 ‘영감의 천재’와 같은 이미지로 생각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등 그의 쟁쟁한 인물들은 이미 역사서에 혹은 당대에 떠도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고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당시 ‘뭘 좀 안다’고 자부한 식자공들이 인쇄 단계에서 그의 작품에 손을 대기도 했다고 하네요.

 

  “사실 셰익스피어 작품 자체가 한 사람의 이름으로 묶여지는 거 자체가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이에요. 우리가 읽는 게 진짜 셰익스피어가 쓴 게 맞을까? 헌데 그게 그리 중요한가? 아니, 실제로 작품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게 정말 단 한 사람의 저자인 게 맞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하는 게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현상’이죠.”

 

  그러니깐 우리가 지금 읽는 ‘셰익스피어’가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무수한 배경과 인물들이 섞인 무언가라는 것입니다. 이상한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등장했고, 무수한 주제들의 ‘셰익스피어’가 실험되고 있습니다.(작년에 무대에 올려졌던 뮤지컬 <햄릿>에는 햄릿 삼촌과 여왕의 로맨스가 핵심 주제였다고 해요, 허걱!)

  ‘셰익스피어’는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이번 낭금은 더 재미있어질 것 같습니다. 음악, 연극, 그림, 영화, 뮤지컬 등. 지금 이곳의 온갖 ‘셰익스피어’를 만나볼 생각이거든요.

설레지 않나요? 온갖 오셀로,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등을 만나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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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지 헝가리안 시어터의 '리처드 3세(왼쪽)   & 윌리엄 블레이크의 '리처드 3세'(오른쪽)

 

 

   3  우리들의 '셰익스피어'를 만나러

 

  “셰익스피어는 소위 ‘전형’을 만들어내는 데 천재적이었어요. 전형을 흔히 ‘식상함’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보다는 독자 혹은 관객이 ‘이건 내 얘기야’라고 자기를 투영시키고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여지가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과 삶, 사랑과 투쟁의 문제를 사유하게 해줍니다.”

 

  덕분에 셰익스피어는 지금까지도 매번 새롭게 읽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나름의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제 경험과 배움과 개인적 성향 등등을 토대로 저만의 셰익스피어를 읽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수강생분들께 제 독해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같은 텍스트를 읽더라도 각자가 완전히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그 점이 기대가 돼요. 다른 누구보다 제가 많이 배워가려고요. 그러니 모두들 낭금 시간에 즐겁게 각자의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해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제가 읽은 셰익스피어를 들고 가서 ‘수줍게’ 이야기 할 거예요.”

 

  네, 우리도 ‘수줍게’ 우리들의 ‘셰익스피어’를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a ^ 같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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