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시를 좋아하는 나지만 국내 시가 아닌 바다 건너의 시들은 왠지 꺼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단 한가지 이유는 바로 어색하고 정서에 맞지 않는 번역 때문! 시를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기에 그나라의 정서와 운율을 우리나라의 그것으로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 시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파리의 우울>이 소산문시라는 것을 알게되고 내심 영 아니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는데 이게 왠걸, 전체 문장들의 흐름에서 부터 딱 들어맡는 단어까지 번역된 시 특유의 어색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번역자의 기량의 문제도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보들레르가 쓴 시집, <악의 꽃>은 어쩔 수 없는 번역의 어색함이 눈에 띄는 걸 보니 아마도 그것이 소산문시라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소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최초로 시도한 새로운 형태의 시라고 하는데 나에게 다가온 소산문시의 느낌은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편안했다. 그것은 내가 가끔 끄적이곤 하는 생각의 단상이나 관찰에서 비롯되는, 불현듯 번득이며 찾아오는 영감과 어딘지 닮은 구석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반면에 내가 놀랐던 점은 그의 소산문시는 정확하고 상징적 의미를 갖는 단어들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놓여있는 시의 특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살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시집이 그러하듯 <파리의 우울>은 정독이 의미가 없다. 두고 두고 꺼내읽는 시집처럼, 그때마다 새로운 구절이 와닿는 것처럼 이번에 첫 번째로 접한 보들뢰르의 <파리의 우울>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이 읽었던 부분은 바로 '군중과 고독'이라는 테마였다. 시인의 숙명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지만 그 숙명이라는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시인에게 군중과 고독은 교환될 수 있는 동등한 어휘라는데 생각해보니 실제로 내가 가장 고독함을 느끼는 때는 내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을 때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인 나를 발견할 때이다. (이 점에서 고립과 고독은 큰 차이를 갖는다) 이렇듯 크나큰 고독이 내 몸을 관통할 때면 나는 자괴감에 빠지고 단지 나만 혼자라고 느끼는게 두려워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려 애쓴다. 이것이 나의 우울. 더욱이 최근에 학교를 그만두면서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이 갖는 차이를 실감하게 됐다.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이지만  벌써 소속감을 찾고 불안을 느끼는 나는 '고독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자'이다. 아직 이런 나 이지만 언젠가는 보들뢰르와 다른 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중 속에 잠기는 쾌락을 알게될 날이 올까?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을 알고 스스로 서야겠지. 그러면 '영혼의 매음'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니리라... <파리의 우울>을 읽고 형체없는 안개에서 한 발짝 빠져나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