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삼겹살 파티도 여유롭게 하지 못하고 가셔서

맘이 편치는 않네요. 암튼 밤늦게까지 번역문 검토하시느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는 방학때 오셔서 편히 쉬다 가셔요ㅎㅎㅎ

2주 안 나갔을 뿐인데 왜 이리 오래된 것 같은지.....맹자와 씨름하던 기억은

벌써 까마득하고, 남산도 너무 멀어 보이니 그냥 이대로 푹 쉬어 버릴까? 하는

욕망이 들썩거리지만 다시 맘을 단단히 고쳐 매고 새벽길을 나서야 겠습니다.

 

처음 한문번역학교에 오면서 했던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던 한문에 대한 갈증

해소와 더불어 번역을 통해서 텍스트를 좀더 꼼꼼하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우리말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실제로 맹자를 번역해 보면서 문장을 해석하고 이해한 것을 그대로 우리글로

옮기기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꿈같은 얘기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번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이 시대에 번역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물음들은 계속 고민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짧은 방학을 이용하여, 번역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보고 싶어 ‘번역의 탄생’(이희재, 교양인)

이라는 책을 한 번 대강 훑어 보았습니다.

영어 번역을 중심으로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저자도 번역을 하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국어의 남다른 개성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결국은 번역이라는 것이 외국어를 우리글로 어떻게 잘 풀어내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이런 책도 우리말을 가다듬는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문 번역을 하면서 한자 단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항상 고민이었는데(이미 우리말로 굳어져서 설명이 필요없는 단어들과 풀어 설명해야 할 단어들에 대한 기준같은 것들) 저자가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한국의 <조선왕조실록>번역은 철저히 직역주의를 고수합니다, 그래서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듣자하니’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측문(側聞)하니’라고 옮깁니다. 물론 직역이라고 해서 나무랄 일만은 아닙니다. 일본어에 밀려 사라진 고유 한자어를 되살려낸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두꺼운 국어대사전에는 실려 있는 단어를 써주어야 합니다. 국어대사전에 안 나오는 말이라면 주를 달아서 뜻 풀이를 해주어야 합니다. 적어도 번역이라면 말이지요. 그런데 가령 “배차(拜箚)에 참여하지 아니한 옥당들을 체직하였다”라는 번역문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배차’는 어떤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고 ‘체직’도 알쏭 달쏭합니다. 복주(覆奏), 부서(簿書), 함사(緘辭)처럼 두꺼운 국어대사전에도 안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놔둔 번역은 엄격하게 말하면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직역과 의역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고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을 시작할 때 어떤 원칙은 가지고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번역을 하면서 문장을 만들때 유용할 만한 것이나 번역 전반에 관해 눈에 띄는 부분을 간단히 인용해 봅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번역문을 만들려면 영어 형용사는 될수록 한국어 부사로 바꿔주는 것이 좋습니다(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번역은 원문과 더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과 덜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한국어의 개성이라는 것은 사실 한국어가 얼마나 다른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를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 대명사를 한국어로 옮길 때 도움이 되는 원칙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시 대상이 모호질 것 같으면 대명사를 명사로 바꾸라는 것이요, 둘째는 문장 안에 없어도 한국어로 뜻이 통하는 불필요한 대명사는 과감히 빼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어로 이어지는 여러 문장에서 뒤의 주어들을 생략해서 좀 허전하다 싶을 때는 ‘그래서’나 ‘그러면서’, ‘그런데’ 같은 문장 접속 부사를 덧붙이면 좋습니다.

 

-한국어는 어미가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미로 주어를 절묘하게 나타낼 수 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일을 강요하지 않겠다” 이렇게 안 옮겨도 됩니다. ‘겠’이라는 어미에 이미 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나’는 필요없습니다. 아울러 ‘만약’도 군더더기입니다. ‘-면’에 만약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문 수동태는 국문 능동태로 바꾸라(맥주는 보리로 만들어진다→맥주는 보리로 만든다)

 

-그렇지만 대체로 현대 한국어 동사가 한쪽으로는 너무 수동적으로 '-되다' 일변도로 나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너무 강압적으로 '-시키다' 일변도로 나간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표현이 극단화 된다고나 할까요?

-사물이 주어로 오는 영어 타동사 문장을 사람이 주어로 오는 자동사 문장으로 바꾼다(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이것을 보면 항상 나는 창 앞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선 내 고향이 생각난다)

 

-포괄적인 뜻을 지닌 영어 부사는 구체적인 뜻을 지닌 한국어 부사로 옮겨주자.

 

-영어 동사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달랑 한국어 동사 하나로만 번역하지 말고 한국어 부사를 덧붙일 수 있으면 과감히 덧붙여라

-‘-적’은 한국어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안 쓰기 어렵습니다. 방금 앞 문장에도 ‘-적’이 들어갔지요. 그렇더라도 ‘-적’을 남발하는 글은 좋지 않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글을 어렵게 꾸며서 독자가 주눅들게 만드는 글은 비겁한 글입니다.

 

-현대 한국어는 특히 감정을 나타내는 '-감'이나 '-심'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감정이 들어간 명사에는 이런 접미사를 굳이 덧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 절망, 비애, 행복, 초조는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까 절망감, 비애감, 행복감, 초조감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심'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냥 공포, 분노, 초조를 느꼈다고 하면 되지 공포감, 분노심을 느꼈다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에 관한', -에 대한', '-을 향해' 같은 표현은 글을 딱딱하고 권위적으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서'는 '햇볕을 가리려고'로 충분합니다.

 

-한국어의 가장 큰 특징은 생략할 수 있는 내용은 생략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어의 개성을 얘기하면서 영어는 한국어보다 명사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언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추상 명사처럼 의미가 압축된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살을 덧붙여 주어야 독자가 당황하지 않습니다. 원문에만 충실한 번역은 무뚝뚝한 번역입니다. 친절한 번역을 하려면 때에 따라서는 단어 하나를 문장으로 번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영어를 중심으로 한 책이라 한문 번역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였던것 같습니다. 언제 읽을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한문과 우리말 관련해서 몇 권의 책 목록을 추가해봅니다.

 

-한문해석사전(김원중, 글항아리)

-이오덕 우리글 바로쓰기(한길사)

-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하늘연못)

-철학을 다시 쓴다(윤구병, 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