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남산 강의. 130205 기억이란 무엇인가

 

눈이 소복히 내린 남산자락에서 정화스님의 <기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귀한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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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억은 조건화되어 있는 무언가가 주변과 만나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합적으로 생각해, 즉 어제-오늘-내일의 나를 동일한 자기, 자아라고 상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란 이러한 조건화된 기억들의 네트워크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각의 동일성을 제7, 말라식이라 부릅니다. 무아에 반하는 자기라는 상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의식(意識)에는 다섯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입니다. 첫째 업식부터 보면, ()은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활동합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도 생명은 끊임없이 활동합니다. 이처럼 생명이 활동하고 남아있는 여력이 기억을 만듭니다. 물론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일정한 힘을 갖는 것들이 기억됩니다.

 

한 편 기억은 가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은 자기통일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데 이 때 네트워크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네트워크의 변화가 세상을 달리보게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억의 가소성입니다.

 

자의식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근본을 이룹니다. 사람들은 태어날때부터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커오면서 그 자체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이야기 잘 못 들으면서 살아가는게 보통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랑받을까라는 식으로 계속 자기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존재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억화 되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받는 방식으로 기억하는게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기억화가 이루어집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허구성을 본 것입니다. 기억채널들을 바꾸면, 근원세포의 네트워크가 바뀌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를 꾸미고 있는 어떤 것들을 부족한 형태로밖에 볼 수 없는 방식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부처님은 온전히 자기 존재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많은 부분들이 이유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로서 업의 활동이 방향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을 정업(正業)이라 합니다. 업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업(身業), 말의 업(口業), 정신의 업(意業)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럼 말의 업, 구업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라는 말을 잘 듣고 자라지 못합니다. ‘이러저러해서 좋다거나 이건 고쳤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지요. 이는 단순히 말로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과 표정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언어를 통해 기억된 내용이 우리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억을 만들게 됩니다. 기억된 언어 채널을 통해 정보가 전달되고, 또 이 때 정보에 부착되어 있는 심리상태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말이 나가는 과정을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도록 조건화되어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인위적으로 그걸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수행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것입니다.

 

따라서 말이 나오는 순간을 봐야합니다. 어떤 점이 맘에 안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좋아해라고 말해야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빼야겠지요. 기억이란 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가소성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바뀌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바뀌려면 일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백일기도를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백일 정도는 해야 바뀝니다. 이렇게 하면 여력에 붙어있는 심리상태의 기억들이 불편하지 않은 말의 쓰임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람은 3년만 지나도 자연적으로 애정이 사그러든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말을 계속해서 하면 뇌세포, 세포들의 네트워크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자체가 의 구조를 바꾸고, 다른 의 양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업(正業)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의지가 기쁘지 않은 쪽으로, 자기동일성을 상처내는 쪽으로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기쁨을 동반하는 것 역시 그것이 연속되지 않을 때 우울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기쁨과 슬픔을 주관하는 호르몬 역시 같은 통로에서 나오는 점에서 둘 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의 변화, 즉 제7식이 아니라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나아갈 때 이는 바뀝니다. 평등성지란 번뇌에 오염된 제 7, 말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로,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의 평등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생물학적 생보다 문화적 양상의 영향이 큽니다. 그런데 이 문화적 양상들이 우리를 속이는 게 많습니다. 기억이 우리 삶을 속인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외부에서 오는 감각, 지각을 자기가 갖는 여러 통로로 가공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느냐에 따라 외부정보를 가공할 때 안 좋게 가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쟁이 심화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정보가 쌓여있는 기억의 창고 아뢰아식에는 한 일만 남아있는 게 아니고 그 일에 부착되어 있는 심리현상도 같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을 가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기존의 모든 사유의 패턴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기억은 항상 변화합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기억을 바꾸기도 하지만, 외부가 내 기억의 채널을 변화시키도 합니다. 부모를 통해 유전정보가 섞인 것이 나에게 내려옵니다. 이는 정보를 섞는게 종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이 갖고 있는 언어의 기억을 끊임없이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물려받은 기억이 바뀌게 되는데, 또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기억은 변합니다. 활동의 여력들은 지금 상태에 맞게 자신의 기억들을 변형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의식의 두 번째 작용인 전식(轉識)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몇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상을 평면인 망막에 입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안에서 몇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때 살아온 여러 생의 기억의 창고 속에 심리상태들이 어떤 스위치가 켜질지 결정합니다. 이것이 전식입니다. 단순히 눈이 보는 것처럼 보여도 눈만이 아니라 온 몸이, 세월의 역사가 이미지를 띄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 앞에 이미지를 띄우는게 의식의 세 번째 작용인 현식(現識)입니다.

 

기억들 중 신호를 받아 어떤 기억의 이미지를 띄울 것인가가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만드는 생명의 언어들이 지금 사람에게 미치고, 독특한 양식으로 밝혀질 때 안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눈앞에 나타난 대상에 대해 분별해 아는 것이 네 번째 작용인 지식(智識)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살아온 역사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의 다섯 번째 작용인 상속식(相續識)입니다. 이 때 과거만 현재로 상속되는게 아니라, 지금 심리상태 역시 미래로 상속됩니다. 상속된다는 것은 생명의 여력들이 대를 이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의식상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이지만, 이는 인간, 그리고 그 이전의 동물의 의식이 이미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우리 눈의 빛이 중성미자처럼 되어있으면, 지구상 아무런 걸림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통과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영상은 아무것도 잡히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의식은 과거의 살아온 역사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수행(修行)은 살아온 기억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은 인식활동입니다.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와 만나며, 영향을 주며,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30년을 살아왔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30년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가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은퇴부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 분이 그런 말을 합디다. “다른건 다 좋은데 이것만 바꿨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같이 산 3-40년 동안 안바뀐 게 어디 그리 쉽사리 바뀌겠습니까. 그래서 100일 동안 3분만이라도 상대를 꼭 껴안고 난 당신이 그냥 좋아라고 말해보는 훈련을 해볼 것을 권합니다. 권하기는 하는데 다들 잘 안하시더라구요.

 

이 때 일단 심호흡 세 번하고 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냥 평상시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가지면 자신도 모르게 경직이 일어나고 긴장도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뇌로 산소공급이 안됩니다. 이 때 심호흡을 해줌으로서 뇌에 산소공급이 원활해 집니다. 이로서 첫째 부착되어 있는 불편한 심리상태에서 편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 말의 기억에 붙어있는 채널들이 엷어집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는가를 잘 살피게 됩니다. 이로서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에 강력한 제동이 걸립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인식활동의 채널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언어 트레이닝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언어화된 코드라 할 때, 말을 바꾸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모든 기억들을 바꾸어내는 것입니다. 이 때 인식활동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내 삶의 의지처가 과거에 쌓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기억들을 통해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 그리고 이것이 근원적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생명은 계속 자기동일성을 만들어가지만 우리는 한번도 동일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식의 연속된 이미지의 동일성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변해가는 것에 대해 이를 허상이라 파악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온 철학적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석가는 변해가는 것이야말로 실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허상이라는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냅니다. 무상한 것이야말로 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세상을 보는 다른 기억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른 기억, 정각(正覺)입니다.

 

무상은 그런 점에서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변한다는 점에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입니다. 이 때 공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공이라는 양상이 있다는 게 아니라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번뇌없는 양상으로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부족한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지만, 자신을 옭아매기도 합니다. 이 때 기억이 뭔가를 살피는 것이 정념수행입니다. 이처럼 계속 보다보면 안다는 것과 심리현상이 분리됩니다. 알아차려진 심리상태와 마음이 분리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저 놈이 나를 힘들게 했구나라는 불유쾌한 감정을 갖게 되고, 이것이 신경물질을 낳고, 이것이 삶을 우울하게 합니다. 하지만 정념수행을 통해 심리현상을 우리가 바깥의 책상 보듯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나에게 불유쾌한 감정이 없어지게 됩니다. 동일한 기억이라도 알아차리는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기쁨, 슬픔에도 들뜨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이 때 이미지가 실재란 없고 무상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정념수행을 통해 알아차림은 기억을 전면적으로 다르게 구성하고, 삶을 다르게 구성합니다. 지혜란 이 알아차림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완벽한 깨달음이 구경각(究竟覺),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경각이라 할 때 궁극적 깨달음이 있는게 아니라 현재가 완벽한 구경각입니다. 이것외에는 다른 어떤 삶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으로 수행을 삼습니다. 이럴 때 자기 존재를 전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차원에서는 완벽하게 다른데, 우리가 사는 실내용은 다른 게 없습니다. 생명의 언어가 순간순간 바뀜을 아는 것, 활동 그 자체가 온전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미래의 결과가 나의 현재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고, 온전히 자신이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은 계속 부족함을 느껴 내부적으로 허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에만 충만한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께서는 책의 제목을 텅빈 충만이라고 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행은 구경각입니다. 인식의 전환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지요. 기억의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삼계를 초탈했다고 말을 할 때, 과거가 부정되거나 미래가 현재를 흔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과거-현재-미래가 오롯이 들어있게 됩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라는 후회나 자책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고 계속 현재의 자신이 휘둘리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이 온 삶인 듯 사는 것입니다. 이는 기억을 밖의 책상 보듯 하는 훈련, 정념수행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처럼 현재를 자신의 완성된 상태로 온전히 긍정하기가 필요한 것입니다.